시 론
책임의 상실시대
이 청
서양화가
해방을 전후해서 태어난 사람들은 아마 땅뺏기 놀이를 기억할 것이다. 이긴 아이가 엄지를 짚고 한 뼘을 반지름으로 돌려 자기 몫을 늘려간다. 얻은 땅을 넓혀가며 흐뭇해 하지만 골목길에 땅거미가 지면 언제 눈 흘기며 다퉈가면서 그토록 영악스럽게 굴었더냐는 듯 쓱쓱 발로 뭉개 버리고 아이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간다.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하필이면 땅뺏기 놀이가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성실한 사람들의 혼란>
입춘이 지나고 우수도 지나 이제 머지 안아 봄이 올 것이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뭐 좀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 하는 것을 보면 영 신통치 않아 보인다. 지뢰 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국민들은 영 불안하다.
어쩌다 우리사회가 이지경이 되었는지 뚜렷한 처방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정말 예삿일이 아니다. 찬바람에 온 몸을 드러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더욱 더 그렇다.
시골 버스 정거장에서 끈기 있게 기다리며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타고 난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본다. 아직도 머리에 이고 장터를 쫓아다니는 아낙들이 모여드는 새벽 닷새 장에서 백 원 단위의 거래 인심을 우리는 요즘 본다.
그런가하면 선거 때만 되면 대 국민약속은 끝없이 반복되는 타임머신의 궤도 속에 가두어놓고 국민들을 향해 전기톱 같은 목소리로 가슴만 후벼 판다.
정거장, 장터, 야바위꾼에게 속아 한숨 쉬며 허탈해 하는 사람들…. 지금어디서나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바보스럽게 보일 만큼 자신에게 성실한 사람들이다.
농사철이 되면 손바닥에 마른침을 발라가며 무디어진 가위의 날을 세워 가지를 잘라내는 과수원 아저씨의 순박한 눈매라도 어쩌다 마주하게 될 때는 어렵사리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심을 바로 읽어 낼 수 있다.
추위에 온 몸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사람들만큼이나 모진세파에 양심을 문질러 아픔을 삭여야 살아 갈수 있는 사람들이 많음은 실로 슬픈 일이다.
사람은 의(義)에 의해서 구속될 뿐만 아니라 자기와의 계약에 의해서도 구속된다.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가 없기 때문에 오늘에 서서 반성과 용서를 말하고 내일에도 잊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사는 것이 우리네 인간사다.
요즈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냉소와 조소로 흘러나오는 뉴스란 이름의 가십성 보도들이 우리를 더욱 쓸쓸하게 한다. 일은 저질러 놓고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일에 끝까지 책임 질줄 알아야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갈 자격이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어느 성직자께서 “내 탓이오”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그러나 그 말씀에 이해는 가지만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가 ‘내 탓이오’를 넘어 ‘우리 모두의 탓이오’하면서 총체적 면책을 구하려 한 것이 아니었던가 묻고 싶다.
세상의 잘못된 일이 일견 우리 모두의 탓이라고 할 때 그토록 거룩하게 뻔쩍이며 금박양장이 된 말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고 내일을 도모하자는 뜻일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탓이라고 말할 때 그 책임은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니라 실체가 사라져 버린다는데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총체적책임은 한 순간 총체적 무책임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책임은 선택한 자의 몫이다.>
어떻게 우리 모두의 탓이어야 하는가? 아들이 부모를 죽이고 방화범이 불을 질러 역사를 불태우고 기업이 비자금을 만들어 세금을 포탈하고 정치인들의 헛된 구호에 속아 넘어가면서도 우리는 부패와 비리가 상식화된 사회를 만든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했다.
과연 우리 모두의 책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