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권력과 돈 이우상(수필가 ·광기교회장로) 정치에 야망을 가진 어떤 이가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전에 먼저 유명한 점술가를 찾아가서 당선되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점술가 왈, 출마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고 재차 물은즉 당선되면 나라가 망하겠고 낙선되면 본인이 망한다는 것이다. 당선되면 권력을 휘둘러 나랏돈을 빼돌리게 되니 나라가 망하게 되고 낙선되면 이미 엄청난 돈을 선거자금으로 쏟아 부었기 때문에 빚을 갚지 못해 가정이 망하게 된다는 설명을 듣고는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는 얘기가 있다.
다 그렇겠는가 마는 정치인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가 않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청렴하기란 정말 어려운가 싶다. 한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를 가졌던 자들이 다음 정권에게 배턴을 넘겨주기가 바쁘게 줄줄이 감옥으로 직행하는 것을 보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조선조 내우외환이 가장 극심했던 선조와 광해조 2대에 걸쳐 그 이름을 떨쳤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전북 익산 출신의 송영구는 경상도 감사를 마치고 환향하는 길에 낙동강을 건널 즈음 그의 말을 이끌던 노복과 대화를 나눈다. “내가 감사로 부임하면서 이 강을 건너오던 때의 그 갓, 그 말, 낡은 도포 자락만이 내 몸에 걸쳐있구나” “하지만 대감의 손에 쥔 부채는 경상도 땅의 것이 아닙니까?” “허허 참, 이 부채를 깜빡 잊고 그냥 가지고 왔구나” 하고 크게 웃으며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와 비슷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우리 김천 양천이 고향인 조선 초 문신이며 사간원 대사간, 경주 부윤, 호조 참판, 한성부 좌윤, 이조 참판, 제주도 감사, 전라도 관찰사를 두루 거친 이약동의 일화가 바로 그것이다. 제주도 감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재임 중에 착용하던 의복이나 사용하던 기물들을 모두 관아에 남겨두고 떠났다. 한참동안 말을 타고 오다 보니 손에 든 말채찍이 관아의 물건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성문 누각에 걸어두고 서울로 갔다. 후임자들이 이 아름다운 일을 기리기 위하여 채찍을 치우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걸어 놓아 기념으로 삼았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채찍이 썩어 없어지게 되자 주민들이 바위에 채찍의 모양을 새겨 두고 그 바위를 괘편암(掛鞭岩) 이라 이름 지어 500년이 지난 지금도 제주도의 노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만년에 김천 고향 집에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을 만하였고 아침저녁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하였지만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적인 시를 남겨 훈훈한 귀감이 되고 있다.
살림이 가난하여 나누어 줄 것은 없고/있는 것은 오직 낡은 바구니 표주박과 질그릇일세./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하네.
이후 성종 때 청백리(淸白吏)로 뽑히고 1493년 6월에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제수를 내리고 평정(平靖)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후 김천의 유림들이 그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감천면 원동 마을에 청백사를 지어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우리는 권력과 명예와 부를 함께 가지면 삼박자를 갖췄다고들 한다. 그리고 모두가 그것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건다. 그러나 이 모두를 갖추고도 불행한 종말을 맞이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 왔다. 그런가 하면 세 가자 중 한 가지를 가지지 못해도 늘 웃으며 이웃과 함께 가진 것을 나누며 여생을 보내다 행복하게 마감하는 이들도 많이 있음을 본다. 어느 것이 진짜 행복인지는 위의 청백리에 뽑힌 두 사람의 행적이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큼을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