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 커플티셔츠를 주고받고 초콜릿과 사탕이 왔다 갔다 하더니 아들이 입대하면서 군사 우편 담당은 그녀 차지가 되고 말았다.
어느 틈에 그녀는 내 일상에도 물처럼 스며들었다. 날씨가 사나우면 건강 걱정이 되기도 하고 바람과 햇살이 좋은 날이면 그녀는 뭐할까 궁금해지기도 하다가 급기야는 선물을 부쳐 주기까지 하는 수선을 떤다.
가끔 그녀는 꽃잎 같은 문자를 보내주며 보이지 않는 딸 노릇을 하기도 한다.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했고 앞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내 일상에서 기쁨과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며느리로 살아온 지 스무 해가 훌쩍 지났다. 아들만 셋을 둔 시어머니는 며느리 셋을 공평하게 사랑하느라 무진 애를 쓰신다. 같이 사는 큰며느리 눈을 피해 둘째며느리에게 밑반찬을 챙겨주고 막내며느리가 보내준 용돈 액수를 슬쩍 줄여서 말씀하시기도 하며 맏며느리 고생한다는 말씀을 모든 식구가 모인 자리에서 잊지 않고 하신다.
셋을 공평하게 사랑하기가 어디 쉬웠을까, 차라리 셋을 똑같이 미워하면 모를까. 때때로 어머니의 그런 성품을 오해하기도 했다. 뻔히 보이는 일들을 에둘러 말씀하시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을 고단하게 해결하시는 것을 보며 왜 저렇게 몇 수를 더 얹어서 생각하실까 답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지내오고 보니 그것이 어머니의 지혜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머니는 한 번도 달라는 법이 없으셨다. 안 된다는 말씀도 내 기억에는 없다. 그저 모든 걸 내 주시며 아무리 어려운 일도 다 되게 하셨다. 하도 전능하여서 어머니는 여자이기이전의 어떤 생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저울의 한쪽 편에 세계를 실어 놓고 다른 한쪽 편에 어머니를 실어 놓는다면, 세계의 편이 훨씬 가벼울 것이라는 말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속은 게 창자처럼 다 비워져 있을 것이다. 아들 며느리가 그 살을 다 발라내고 짠 눈물에 속속들이 씻겨나가 껍질만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을 것이다.
“너하고 나는 좀 슬퍼야…딸이 없잖아!”라는 말씀을 하실 때는 그 큰 눈이 동굴처럼 깊어 보인다. 아무리 딸이 되려고 해도 나는 ‘며느리’라는 변방의 여자인가보다. 가끔 밤중에 시댁에 갔다가 잠든 어머니를 보고 돌아오는 밤이면 하늘이 온통 출렁댄다.
다시 오월이고 어버이날이 지났다. 어머니는 몸살기를 재우느라 판피린 한 병을 드시고 또 우리를 위해 밥상을 차리셨다. 몇 장 지폐에 얹은 말과 손가락으로 감사의 시늉만 할 뿐 우리는 또 어버이날을 거꾸로 쇠었다. 그러고는 어머니 곁에 착 붙어서 달콤한 말만 한자 한자 건넨다. 어머니, 제가 늘 입버릇처럼 말씀 드리는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어머니처럼 살겠다고요, 어머니 같은 시어머니가 되겠다고요, 어머니만큼만 살면 한 생을 잘 사는 것이라고요.
그러면 어머니는 아직도 소녀처럼 부끄럽게 웃으셔요. 아프지 말라고 하시면 어머니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봅니다. 절대 아프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듯이 비장해 보이기도 해요, 어머니! 미워하기는 쉬워도 사랑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세상, 앞으로 저도 두 며느리를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도록 지혜의 길을 오래 오래 보여 주셔요. 저도 어머니처럼 아들만 있어서 딸 없는 서운함을 같이 느끼는 것조차 다행이고 든든하며 기분이 좋아요.
나의 시어머니가 되어주신 어머니, 깊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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