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안경을 세 번째 바꾸었다. 시력은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는다. 신문은커녕 웬만한 책들도 안경이 없으면 읽지 못한다. 물에 풀어진 밥알처럼 둥둥 떠다니는 활자들 앞에서 말 그대로 눈 뜬 장님이 된 지경이라 한 번씩 막막해 질 때가 있다.
그래도 기어이 읽어내려고 하는 이 미욱함이란! 읽어 머리에 새겨지면 좋으련만 내 눈에 반사되었다 산산이 흩어질 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버리지 못하는 책들이 수북하게 쌓여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을 사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으니 활자중독증에 가깝다고 하겠다.
새해 벽두에,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나도 내 물건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하여 마음을 단호하게 잡고 책과 옷가지부터 버릴 것과 둘 것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책을 한 권씩 폐지로 넣을 때마다 저자에 대한 송구함과, 내용에 희비가 교차하던 지난 감정, 상식의 보고로 뿌듯했던 내용들이 잔잔하게 흘러갔다.
내가 좀 더 젊었을 때의 지식과 추억이 한 박스씩 쌓여가고 어느새 비어진 책장은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요즘 옷은 낡지 않으니 옷가지를 정리할 때에는 수없이 망설였지만 며칠 동안의 수고로 서랍속도 헐렁해지고 옷장 안에도 깨끗한 바람이 드나든다.
이제 저 곳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아, 나는 또 채울 것을 염려하고 있구나.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이 되었구나, 가능한 한 끝까지 묶어두려고 하는 이 정신적 사치에 민망함이 들었다.
그러나 이전보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버리는 것에 대한 미련보다는 새 공간을 바라보는 홀가분함이 훨씬 커졌다는 것이다. 또한 새 물건에 대한 욕심이 신기하게도 줄어가고 있는 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집의 여백은 오롯이 살아나고 난 그 여백에 얹혀졌다. 감히 이것을 두고, 나이를 먹어가는 소중한 덤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새해 다짐은 ‘쇄소응대(灑掃應對)’로 정했다. 물을 뿌려 쓸고 응대한다는 뜻으로, 집 안팎을 깨끗이 거두고 웃어른의 부름이나 물음에 응하여 상대함을 이르는 말이다.
인생의 모든 단면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속에 에너지의 형태로 닻을 내린다. 잡동사니를 걷어내면 내 존재 자체를 변형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과 옷가지를 정리하면서, 다른 잡동사니를 걷어내겠다는 다짐이 일상의 크고 작은 돌부리에 자꾸 걸린다. 해서 그것이 또 다른 걱정거리가 되어 마음의 잡동사니로 남고 있다.
내 안팎은 여전히 추하고 복잡하다.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으로 때때로 서 있다.
물을 뿌려 쓸고 응대하는 삶의 모습이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새해에 얻은 나이의 덤, 여백의 즐거움을 모질게 이어가리라. 그러면 언젠가 웃어른의 물음에 지극한 마음으로 응대할 수 있을 것이다. 부름과 물음에 조아리고 싶은 내 아버지는 아니 계시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