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남편은 고향친구를 만나러 울산에 갔었다. 친구의 코치인가 느닷없이 “당신 어디 가고 싶으면 휴가 줄게” 한다. 저 사람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인심 쓰는 척 무슨 속셈이 있는 걸까. 순간 웃었다. “왜 그래?” 늘 바라던 희망사항이었지만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어디를 가는 건 다 공식적인 일로 어울려 다녔지 나 혼자 휴가차 떠난 적은 없었다. 집에 있으면 보이는 일이 우선이라 괜찮은 생각이 들어도 바로 글로 옮기지 못하고 놓쳐 버릴 때가 많았다. 이제는 가사일 좀 줄이고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가고 싶다 했다. 부산 태종대에 가면 뭔가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자기 입으로 먼저 그랬으니 단 번에 통과다. 살다가 별일이다. 새장속의 새가 아름다운 구속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유롭게 날 수 있겠다.
나는 여행을 참 좋아하지만 현실에서 공식적인 것 외에는 그럴 기회가 잘 없었다. 그래서 TV에서 만나는 프로그램에서 간접 여행을 많이 하며 즐긴다. “에라 잘됐다 먼저 등 떠미는데 안 가면 다음 기회는 또 없을지 몰라 그래 마음먹은 김에 가는 거야 기차여행 떠나는 거야.”
남편은 기관사다. 연애시절 기차는 실컷 탈 줄 알았는데 고객은 많이 태우고 다니지만 가족에게는 그런 기회를 잘 주지 않는다. 그날 남편은 저녁 출근이고 큰딸은 하루 휴강이라고 했다. 아침 일찍 서둘러 가족들 식사준비를 해놓고 08:59 김천 발 새마을호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부산으로 내려갈수록 봄은 이미 떠나고 여름이 오고 있었다. 창밖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마음을 설레게 하고 주부라는 걸 잊게 했다. 혼자서 하루를 보내도 심심할 틈이 없을 것 같았다. 집을 나왔으니 집 생각 하지 않고 괜한 걱정도 안 하련다.
새마을호는 나를 부산에 빨리 데려다 주고 싶은지 막 밟아댄다. 도착하니 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태종대 그때 기억을 살려 준다. 여고를 졸업하던 해 여름이었다. 태종대는 친구들과 바다 구경을 처음 가 본 곳이며 나의 마음을 확 끌어 당겼다. 산으로 막힌 곳에 살다 탁 트인 바다를 보니 살아가는데 자신감을 얻었다. 연애시절 남편이랑 이곳을 또 찾았다. 그땐 검표를 했었다. 남편은 내 손을 잡고 싶어 철도 가족은 손을 잡고 나가는 거라며 어떨 결에 서먹한 손을 잡기도 했다. 태종대에 들러 시간을 보내다 막차를 타고 간다하니 아버지는 “알았다”로 말문을 닫으셨다. 가족들과 한 번 가고 이번이 네 번째다. 다 좋은 기억들이다.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달려 태종대에서 점심을 먹고 순환열차를 기다렸다. 비둘기는 노력하지 않고 연인들이 주는 먹이로 일찍이 사는 방법을 아는가 싶다. 유람선은 파도에 출렁이고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은 관광지를 말해 주며 내 기분을 업 시킨다. 가슴을 도려내는 동백꽃은 나를 보고 바람 맞은 여자라 놀린다. 바람 세게 부는 날 제대로 바람 맞아 보는 거지. 바위 틈새로 바람을 피하다 보니 왼쪽은 불륜의 은밀한 거래가 오가고 오른쪽은 관광객의 점심시간이다. 관광객은 혼자 있는 내게 미안한지 커피와 과일 떡을 주며 일찍 자리를 비껴주고 갔다. 이번 휴가로 난 마음을 비울 거다. 걸러지지 않는 것들로 가득 찬 것들을 저 바다에 비우고 갈 거다. 지금까지 너무 바쁘게 멋없는 삶을 살았다는 생각을 하며 구미쯤 오니 휴대폰이 울렸다. 하행선 열차에 근무 중인 남편의 전화였다. 여행이 즐거웠냐는, 집에 잘 들어가라는 평범한 전화였지만 전에 없이 짠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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