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이 고장 나서 막막했다. 적막이 흐르는 밤 그는 문득 아이들이 쓰던 4B연필을 들었다. 스케치북을 찾아들고 섬세한 필치로 구름 위에서 이 땅을 비추는 조명탄처럼 빛을 그렸다. 웃고 있는 나의 모습도 스케치했다. 고목에 핀 매화도 그리고 해바라기도 수박도 참외도 그리고 신비로운 산골짜기도 그렸다 생각에 깊이 잠긴 채 4B연필과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그의 손은 신이 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로 거룩하게 보였다. 선이 뚜렷한 다섯 개 손가락에 참 신비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한 세월 화투장과 술잔으로 타락했던 그가 새로운 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도박으로 돈을 잃으면 술에 취해 유리창을 깨고 쇠망치를 들고 으름장을 놓던 손 갈비뼈가 부러져 큰 고생을 한 내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아름답고 거룩한 그의 손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밑으로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 보였다.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인가. 신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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