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설마 걱정하면서도 우리 김천은 피해 없이 그냥 지나갈 줄 알았던 태풍 ‘산바’가 375밀리의 엄청난 비를 몰고 오는 바람에 그만 물난리를 당하고 말았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해줄 것을 정부에 신청해 기대가 되지만 아직까지도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는 완전히 복구되지 못하고 많은 수재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급기야 김천시의 큰 행사인 시민체전까지 취소하기에 이런 지금, 또 대선을 불과 3개월도 채 안 남은 가운데 그렇잖아도 어수선한데 추석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서민들의 한숨은 깊어가고 있다. 그러나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듯이 과수원의 사과는 어느새 붉게 익어 가고 들녘의 벼들은 황금물결로 출렁이는 가을이 여물고 있다.
지난 토요일 제자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키 위해 항도 부산의 빌딩 숲 사이를 지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몇몇이 따라오며 두런두런 하는 말이 들려온다. “사람 사는 게 뭔지, 식구들 목구멍 하나 채우려고 정신없이 쫓아다니다 보니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겠네. 지금이 가을 맞아? 올해는 그 흔해빠진 단풍놀이도 한번 못 갈 것 같네… 지금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 맞나?” 꼭 나 같은 서민들이 할 얘기를 대신 해 주는 것 같다.
하기야 요즘 같은 세상에 자연이 변해가는 모습을 제대로 보면서, 또 느끼면서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웃음도 눈물도 깡그리 말라 버린 삭막한 회색 빛깔의 사회에서 힘겹게들 살아가고 있다. 어지간했으면 소속정당도, 지지기반도 없는 무소속 대통령 후보에게 많은 국민들이 박수를 치고 있을까 싶다.
어느 분의 글이 생각난다. 잠자리에 누운 아내가 그날 저녁에 감상한 영화로 눈물 흘린 일이 생각나서 남편에게 “나는 왜 눈물이 많겠어요?” 했더니 남편 왈 “나는 하품만 해도 눈물이 나오는데 뭘…” 남편과 은근히 대화의 물꼬를 트고 좋은 시간을 기대했던 아내의 간절한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버린 남편의 무드 없는 그 한마디가 그만 초를 치고 말았다.
소설 속의 여자가 남편이 가까이 오자 “나는 당신보다 향긋한 와인이 더 좋아요.” 이 한 마디 때문에 그 다음날 보따리를 싸게 했다는 이야기를 대하면서 노 무드(No mood)가 어찌 그 사람들에게만 있는 일일까 싶다. 이 모두가 다 재미없는 사회 탓이리라.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사이버, PC방 등이 어지럽게 난무하여 인간의 순수한 감정이 어느 한 곳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없는, 너무나 비정하고 삭막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더라도 좋은 감성을 느끼고 한 가닥이라도 분홍빛 아름다운 삶의 여유를 챙길 수만 있다면 무미건조한 생활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텐데…. 자연만은 어김없이 때에 맞춰 많은 것을 우리에게 베풀고 있다.
요즈음 고맙게도 온통 황금색으로 수놓은 들녘만은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자연의 순리를 보면서 우리도 이제는 겸손한 자세로 가치 있는 것을 느끼고 터득하면서 풍요를 함께 했으면 싶다.
결실의 계절,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바라보는 농부, 열매가 맺히도록 헌신과 희생으로 수고한 농부, 그런 농부를 사랑하는 아내가 진정 가을을 느끼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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