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i김천신문 |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라는 책에서 쓰레기 미학을 강조합니다. 이는 버려지는 것이 없이 만들어지는 작품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쉽게 표현한다면 창고처럼 지저분한 화실의 환경 없이는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지 못하는 것이나 더 가깝게는 연필밥 없이 어떻게 연필심이 다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아브젝시옹(abjec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추방함’이라는 뜻으로 사상가이며 정신분석학자인 쥘링 크리스테바가 명명한 것입니다. 즉 미켈란젤로의 작품인 ‘모세’나 ‘깨어나는 노예’는 맨 처음에는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에서 조각조각을 떼어내 태어나는 것처럼 이 상을 만들기 위한 같은 떨어져 나간 쓰레기(거룩한 쓰레기, abject적인 것들)를 분리해 내어야만 비로소 형상은 구성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이 오늘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정화된 맑음을 위해서 쓰레기 매립장, 처리장이 있었습니다. 같은 논리로 오늘의 여유로운 삶이 가능했던 이유는 땀 흘리고 노력했으며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자녀의 교육에 헌신한 선배들, 어르신들이 있었던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며칠을 간격으로 살아가기 힘이 들어 자신과 자녀의 목숨까지 같이 던지는 자살과 자녀의 살인 이야기가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존재이유를 말하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들이 ‘국민의 보호’가 그 근본 이유라고 합니다. 다른 나라와의 싸움에서 막아야하는 가장 기초적인 일에서부터 살아있는 국민이 ‘안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힘을 다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국가의 방향이고 이를 우리는 ‘복지국가’라 이름하고 이에 대한 정도에 따라 ‘선진국가’라 하여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지역의 모습, 이 국가의 모습은 어떠함인지요?
오늘의 부와 행복, 여유를 위해서 선조들의 아브젝시옹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나라를 위해서 같이 형성된 부분을 희생해서 오늘의 작품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위 우골탑이라는 부모의 뼈 빠지는 희생과 도움이 있었기에 자연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를 교육자원이라는 부국을 만들 수 있는 기원을 이룩하게 했고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기치아래 열악한 노동조건도, 숨 막히는 강도의 노동도, 인간이하의 대접도 그저 돈만 되면 한다는 아픔으로 이루어진 아브젝시옹이지요.
오늘의 이 죽음들은 그럼 어떤 말로 연결될까요? 어쩌면 우리사회가 모두가 바라는 모습을 위한 거룩한 희생(이런 저런 조건, 이런 저런 제약을 넘어 인간다운 삶이 국민의 행복이고 이는 보편적인 돌봄과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의 한 조각이리라고 자위합니다. 그 슬픔을 이리 위로의 말로 덧씌우는 것이지요.
분명 아브젝트가 있어야 조각품은 탄생합니다. 그러나 원석을 정리하고 그 원석에서 보물을 찾아 내어가는 과정에서 떨어진 꽃잎들이 아프기만 합니다.
제발 이 죽음과 이 아픔들이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돌봄을 받고 그 돌봄으로 인해 목숨을 끊는 일은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었다는 거룩한 희생이 되시기를 빕니다.
시장으로 나오겠다고, 시의원으로 봉사하겠다고 임에 거품을 품는 분들이여, 그리고 복지를 위해 그 약한 사람들의 돈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임용된 공무원님들, 일도 많지만 사람도 적지만…….
죽어가는 그들을 혹 만나실 경우 뭐라 하실지 대답할 말을 가슴에 적어 두시기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