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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김천신문 |
봄이 되어도 도시의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 아파트 단지 내의 화단에 개나리가 눈부시게 피어나고 가로수마다 움이 트지만 아이들은 먼 하늘의 구름만 바라보아야 한다. 각종 색소가 든 쭈쭈바를 빨며, 삶은 감자가 아닌 콘칩을 먹으며. 보들레르는 다음과 같이 목가적으로 여행을 예찬했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경치 좋은 어디로 여행을 가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직접 느껴볼 수 없다.
좀 멀리 나가면 뚜껑이 없는 맨홀과 웅덩이, 그리고 지난 겨울에 친구가 건너다 다친 찻길이 있다. 유흥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아이들의 활동 공간은 집과 인근 동네를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또 학교 주변마다 폭력배가 늘어났다는 보도에 어느 부모인들 걱정이 되지 않으랴.
아이들은 집에 가도 마음껏 놀 수가 없다. 자신의 능력과 소질과는 전혀 무관하게 어른들의 당위성에 의해 초등학교 때부터 방과후에 컴퓨터·미술·무용·피아노·주산·암산·태권도·웅변·발레 학원 중에서 두세 군데를 순례해야 한다. 교육학자들은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자기 자식이 영재일지 모른다고 착각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은데다, 아이들 또한 훗날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언제 어떻게 낙오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일찌감치 느낀다. 요즈음엔 친구도 학원에 다니면서 사귀는 경우가 많아 이제 몇 군데 학원 순례를 갖고 부유층의 과잉 교육열 운운하며 비난하면 구시대 사람으로 오히려 욕을 먹는다. 어쨌거나 부모가 일방적으로 정해준 스케줄대로 아이들은 자동 조종된다.
단독주택이든 아파트든 집에서의 놀이는 또 어떤가. 봄바람 불어오는 들판을 달리며, 시냇가에서 모래성을 쌓으며, 벌에 쏘이며 자라난 우리들은 자연의 신비를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우리의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보며, 게임을 기계와 더불어 하며 자란다. 게임을 못하면 친구도 잘 못 사귄다고 한다.
수십 억 상속과 횡령, 수억 개런티와 연봉,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는 들려오는 억억 소리를 듣고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 화폐의 위력 대신 맡은 바 직분에 최선을 다한 사람의 성취감과 겸허함을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나는 물질적인 풍요를 만끽하는 것을 보고 “요새 아이들은 정말 행복하다”거나, “부러울 것이 없는 세대”라는 어른들의 말을 자주 듣지만 그리 쉽게 수긍할 수는 없다. 요즈음의 아이들은 응달에서 물만 먹고 자라는 콩나물처럼 연약하기 때문이다. 화신보다 먼저 아이들의 옷차림에서 봄은 오지만 자연의 변화를 감지케 하기 위해 우리 어른들이 해준 것은 없다. 공원에서 하루 놀다 온 것으로 아이에 대한 부채를 다 갚았노라고 자위하는 어른이 혹 있을지 모르겠다.
자연과 벗하며 자란 우리 어머니 세대의 봄도 행복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봄이 오면 더욱 굶주렸다. 일제 말기의 궁핍상은 당신 세대가 아닌 한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의 어머니는 종종 들려주셨다. 피땀 바친 쌀가마는 일제가 죄 공출해가고, 배급 나온 만주산 콩깻묵(지금은 사료나 낚싯밥으로 쓴다)이나 밀기울로 죽을 쑤어 먹는데, 그나마 달이 뜰 정도로 멀건 죽이라 물배를 채우는 것이나 같았다고 한다. 온 가족이 누렇게 부운 얼굴로 겨울을 넘겨 봄바람을 맞이하면 겨울보다 더 무서운 보릿고개가 닥쳤다.
“논흙 떠다 쑥 버무려 쪄 먹던 보릿고개”라고 나는 어느 시에서 우리 어머니 세대의 슬픈 봄맞이를 노래했었다. 보릿고개가 오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뒷동산에 올라가서 배고픈 것을 면해보고자 물오른 소나무의 속껍질(송기)을 벗겨 와야 했다. 그 당시에는 전국의 어느 소나무 하나 성한 것이 없을 정도였다니 일제 식민지 지배의 잔혹상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지경이었나 보다.
어머니들은 당신들의 어린 시절, 어른들과 함께 들로 나가 청보리를 베어 와 국을 끓여 먹었다. 또 소나 말의 사료로 쓰는 둑새풀을 뜯어다 끓여 먹기도 했지만 좀처럼 그놈의 허기는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지천으로 피어나는 진달래꽃을 맛있는 과자인 양 뜯어먹으며 우리의 어머니는 들판과 산언덕에서 잡풀처럼 자라났다. 그토록 못 먹고 자란 아이들은 6·25동란이라는, 온 국토가 초토화되고 부모와 생이별하는 비극까지 맞이한다.
?? 내 어머니 세대와 내 아이의 세대 사이에는 먹는 문제를 놓고 보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불과 50∼60년 상간에 아이들의 봄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손녀가 한약보다 쓴 산나물을 잘 드시는 할머니를, 할머니가 피자를 좋아하는 손녀의 입맛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죽은 이들의 한숨이 모여 아지랑이로 피어나는 이 나라에 또다시 봄이 왔다. 이 땅의 아이들은 봄이 와도 불행했었는데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얼마만큼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