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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꽃을 지우는 시간

윤애라(시인·아동문학가)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15년 03월 25일
ⓒ i김천신문
봄꽃들이 앞 다투어 꽃을 피우자 내 정수리도 드문드문 꽃을 피운다. 희끗한 꽃술에 조금 컴컴한 꽃잎을 가진 ‘시간’이라는 꽃이다. 하루에 0.3밀리씩 열심히 자라나는 그 꽃잎을 처음에는 하나씩 뜯어내기도 했었다. 거울 앞에서 눈을 치켜뜨고 족집게를 동원하기도 하고 아들 무릎에 누워 용돈을 흥정하기도 했다. 한 올씩 돋아나는 그 꽃잎에 조바심이 나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온 몸에다 공평하게 제 영역을 확장시키며 새치와 노안과 주름을 선물하고 있다. 희끗한 꽃잎을 휘날리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사람의 부러울 때도 있지만 아직 나는 그런 용기가 없어서 자주 그 꽃잎을 지우고 있다.

 오래 전, 어머니와 아버지를 나란히 앉으시게 해서 염색을 해드리곤 했었다.
염색약을 비비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의 둥근 등에는, 창을 열고 들어온 햇살이 노랗게 업혔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주억이며 말씀을 이으시던 그 따뜻한 두 분의 둥근 등. 
 나는 일류 미용사인 양 요란한 빗질로 아버지 어머니 흰 꽃잎을 까맣게 지워드렸다. 두 분의 시간은 평행선이 되었고 수년의 터울을 같은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버지 목소리에서 깊은 종소리가 났고 어머니 두 뺨은 홍매처럼 붉어졌다.
아버지 얇게 덮인 피부 속에서 푸른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올 것 같았다.
쌍 겹이 무거워 축 처진 어머니 두 눈은 별빛이 튈 것만 같았다.

 나는 새하얀 교복 깃을 단 열일곱쯤으로 돌아가 있었다.
희끗한 세월 까맣게 지우고 싶으셨겠지. 하얗게 엉켜버린 세월을 검은 빗질로 가지런히 뉘어 놓고 싶으셨을 것이다.
다시 흰 꽃이 정수리를 덮을 때 까지 두 분은, 검게 칠한 그 시간을 그렇게 즐거워하시더니 언젠가부터 염색을 마다하셨다. 희끗한 게 보기 좋다는 자식들 말을 그대로 믿으시는 척, 허옇게 자라나는 그 시간을 진심으로 수용하고 계셨다.
무얼 그리 지우려고 애를 쓰느냐, 눈 나빠지니 자주 하지 마라 종용하게 타이르시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꽃을 지우며 산다. 무얼 그리 지우고 무얼 그리 숨기며 살아가는 것인지 흰 꽃잎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지운다. 염색약을 바르고 앉아있는 내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두어 달 동안의 검은 머리칼은 잠시 시간을 되돌려 놓는다. 나무는 열매를 얻기 위해 꽃을 지우는데 정수리에 핀 이 꽃을 지우면 어떤 열매로 돌아올까. 아마도 까맣게 반짝이던 그 시간의 내 꿈들을 뒤적여 보는 시간이 아닐까. 하릴없이 뒤적이며 과거에 자신을 묶어 놓는 것이 아니라, 잠깐이나마 빛나는 그 지점에 서 있다가 다시 당당하게 걸어가고 싶은 것이다. 이러다 서서히 꽃을 지우는 그 간격을 넓히며 하얗게 발효되고 싶다. 시간이 주는 선물을 감사히 받으며 그대로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꽃을 지울 시간, 벚꽃 길을 봄밤이 까맣게 지우듯!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15년 0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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