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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김천신문 |
앞서가는 차량이 좌우 깜빡이를 켰다 껐다한다. 뒤에서 오는 차는 도대체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고 묻는다. 대답을 들으면 더 헷갈린다. “왜 한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런 사고방식을 버려라. 양쪽으로 다 갈 수 있다”고 소리를 지른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기현상은 이 나라 정치 지도자들과 그들의 방향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국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무원칙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
누구에게나 권력과 치부는 탐욕의 대상이며 생존은 가장 원초적 본능이다. 그런 것들은 자체로서 나쁘지 않은 소중한 가치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기본위에서 원칙이 섰을 때 가능한 일이다.
원칙은 규범이며 규범은 이성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성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이성을 소유하고 규범을 만들며 원칙에 따라 산다는 것은 공동체 속에서의 서로에 대한 약속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옛날이나 지금이나 짓누르고 있는 고단한 삶의 중력에서 조금도 비켜나지 못했다는 흔적이 뚜렷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가 짊어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헤아리기는커녕 폭력에 가까운 변덕과 몰락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번지는 불화와 갈등으로 시간을 보내버렸다는 회한이 가슴을 파고든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분법적 사고가 지난 시간 우리를 덥석 물어버렸고 그 속에서 은연중 휩쓸려 인간 삶의 고유한 무늬조차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지금 이 시각 우리들이 겪고 있는 대립과 분열은 애석하게도 쓰러져도 웃으며 일어서는 너그러움으로 치유되지 못하고 오히려 편협함과 천박함으로 도배질 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 불화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무기력으로 일관되게 만들었고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가치관의 양극화를 불러왔다.
손사래를 쳐도 계속해서 쏟아지는 막말의 소나기는 우리들의 자긍심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 오면서 제 발등 제가 찍는 것처럼 스스로를 폄훼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기본의 부재 속에서 무너져 내린 파괴된 원칙의 소산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최소한의 양심에 배치되지 않게 획득된 경우에만 가치로서 존재할 수 있다.
원칙에 위배된 부와 권력 생존은 원칙에 맞는 빈곤 무력 죽음보다 못하다.
원칙에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소신과 일관성을 가지고 살아감을 뜻하고 자신의 원칙에 맞게 산다는 것은 자신의 정직함을 의미하며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다짐을 함의(含意)하고 자신의 정체성의 다짐은 자신의 존재의 확인을 뜻한다.
인간의 경우 원칙 없는 삶은 즉음과 다름없고 원칙 없는 인간의 존재는 더 이상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원칙 없는 삶은 인간적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습관이 아니라 이미 신앙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다.
<카르멘이 그리운 시대>
자신의 실존적 소신에 따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과거의 애인 호세에게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칼에 찔려 죽기를 선택한 집시 여인 카르멘은 문학 속에서 모든 남자들의 마음 속에 뜨겁게 살아남았지만 권력과 부귀를 따라 사치스럽게 살았던 과거의 미희들이나 오늘날의 수많은 여인들은 어느 남자의 상상 속에서도 아름답게 존재하지 않는다. 새삼 카르멘이 그리워지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