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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에 북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볼 것도 많고 그림 같은 경치도 많아 보는 것마다 담고 싶은 아내는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면서 많은 사진을 찍어 왔다. 그런데 동행한 일행 중에 한 사람이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을 보면서 ‘왜 나는 셀카봉을 준비하지 못 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앞섰다. 나는 전혀 남의 힘 빌리지 않고 혼자 다니면서도 불편해 하지 않는 그를 선망의 눈으로 봤다. 셀카봉을 방송에서 몇 번 본 것 같더니 이제는 관광지마다 이런 풍경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처음엔 어색하던 것도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지나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면 셔터를 눌러주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인도 사진기를 내밀면 찍어주고 돌아서던 친절도 이제 머잖은 모습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이 기발한 발명품들로 해서 ‘나 홀로’ 의 현대인을 더욱 양산하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한편으로 지울 수 없을 것만 같다. 가전제품들도 점점 작아지는 추세로 많이 생산 된다고 한다. 일인용 냉장고에 일인용 밥솥에 온갖 것이 혼자 사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개발되는 것도 사회변화로 당연시 되지만 한편으로는 점점 ‘홀로’를 더욱 재촉하는 것 같아서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 어느 식당에 들렀더니 ‘냉수는 셀프’라고 적힌 것을 보면서 물 한 컵도 서비스 못하겠다는 주인의 태도가 얄밉게 여겨지고 손님에 대한 박대가 아닌가 싶어 서글퍼진다. 상술 서비스마저도 셀프에 밀리는 세상이다. 서로 협동하고 서로 돕는 것보다는 ‘나 홀로’를 즐기는 현대인이 갈 최종점은 결국 고독일 것이다. 점점 고독으로 내어 모는 현대의 문화가 노처녀 노총각울 양산하고 결국은 인구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된다.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나르시스는 자기를 사랑하는 요정 에코에게는 관심이 없어서 마침내 에코 요정의 저주를 받아 물에 비친 자기 그림자에게 반해서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취하여 물가에서 떠나지 않다가 결국에는 물에 익사하여 죽음을 당한다. 그가 죽어서 물가를 지키는 수선화로 피어났다고 한다. 후대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에게 도취된 것을 나르시시즘이라 한다. 현대인의 ‘나 홀로’문화는 나르시시즘과 흡사하다. 상대와 관계를 거부하고 자신에게 움츠려 들어서 자신의 공간만 확보하고 즐긴다. 타인에게는 무관심하면서 외롭다고 하소연한다. 각자 자기의 성을 쌓고 타인이 끼는 것을 꺼려한다. 스스로에게 울타리를 쳐 놓고 자기 울타리 안에서 왕노룻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는 바깥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사는 젊은이가 넘쳐난다. 나르시시즘에 젖어서 나의 빈자리를 남에게 양보하지 않는 현대인이지만 사랑조차도 나르시스를 닮아 간다면 자기를 멸망으로 이끄는 길임을 명심할 일이다. 나보다 상대를 더 소중하게 여길 때 나를 사랑하는 더 큰 길이 열리는 것이다. 상대를 위해 희생한 삶이 오히려 죽음을 초월해 영원히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추앙되는 결과를 낳는다. 문화는 셀프로 가지만 남을 배려하고 이웃을 둘러보고 서로 아름다운 관계를 가질 때 온전한 참사랑이 실천되는 아름다운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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