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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을 잃어버리는 건 어떻게든 가슴에 생채기를 남긴다. 하다못해 겨울이면 늘 지니고 다니던 낡은 장갑이라든지, 목에 두르던 머플러 따위를 어디엔가 흘리고 귀가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가방을 뒤적거려도 찾을 수 없을 때, 당장의 추위보다는 익숙한 느낌을 잃어버린 데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더구나 잃어버린 것이 사소한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나는 어느 해 학부모로 만났던 이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녀는 호떡 몇 개 담긴 검정비닐봉지를 건네주는 일이 잦았다. “선생님 목 아프시죠?” 하면서 예쁜 상자에 오색 종이테이프를 깔고 사탕을 종류별로 세팅해서 갖다 주던 학모들의 마음은 얼마나 정성스러운가. 그러나 나는 십오 년이 지난 지금도 “선생님, 다른 반 선생님들하고 잡숴요” 하면서 건네주던 그 호떡을 잊지 못한다. 아이의 담임이므로 그저 좋아해준 그녀의 마음은 검정비닐에도 결코 남루해지지 않았다. 그 다음해 나는 다른 학교로 이동했는데 그녀는 둘째를 가져서 무거운 몸임에도 불구하고 복숭아를 한 상자 가지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를 찾아왔다. 나는 함부로 몸을 쓴다고 나무랐지만 그녀의 소탈한 웃음은 내가 감사인사만으로 끝내기에는 너무 정다웠다. 나는 그녀가 몸을 풀면 갖다 주려고 아기 옷을 미리 사 두었다. 그런데 그녀의 출산 후 2주일 지났을 때 그녀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남편의 잠을 뺏을까 싶어 아기랑 둘이서 자던 그녀가 쓰러진 걸 발견한 건 이른 출근을 하려던 남편이라고 했다. 병원에 가니 모니터에 나타난 그녀의 뇌파는 이미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숨소리는 그녀의 웃음소리처럼 컸으나 거칠고 참혹했다. 그녀의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곳곳에 박혀있어 저승길로 가는 외로운 길을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듯했다. 나는 그 발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내 앞에서 늘 환하던 그녀의 얼굴은 가면처럼 무표정한 채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쉭-’ 기계호흡소리만 중환자실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죽음 뒤 나는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던 것 같다. 상실은, 다시는 마주할 수 없다는 공포로 슬픔은 극대화된다. 중고차나 오래 살던 집을 팔 때도 새 것을 장만한 행복의 한편에는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원히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과의 이별에 대한 미련이 있다. 내 것이었던 사물은 객관화시킬 수가 없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의 나날들이 낡은 집에, 덜덜거리는 차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상실은 일상에 대한 관심을 송두리째 잃게 만든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치 안에 웅크린 채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은 물론이려니와 잃어버린 사랑, 멀어진 꿈, 자신의 무능과 마주 선 절망 등 한 사람의 생애에서 견딜 수 없는 순간은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듯 그 시간에는 고통을 절대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는 흐린 안개 속의 빛 한 줄기만 있어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우유통 속에 빠진 개구리가 살아남기 위해 발을 휘젓다 보면 치즈로 바뀌어서 살아나오듯이. ‘무릎딱지’라는 책은 절대적인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는 한 꼬마의 이야기이다. 이 세상에서 부모를 잃는 아이는 적으나 살아가면서 절대 이겨내지 못하리라는 절망 속에 빠지는 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배신같이 극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일방적인 관계, 일그러진 꿈으로 인한 공허와 외로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믿음 하나가 필요함을 이 책을 알려준다. 바로 내 마음이 사랑을 믿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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