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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친구들과 중국 구이린(계림 桂林) 여행에서 천하제일이라 일컬어지는 계림의 산수를 즐기던 우리는 20위안 지폐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원보산과 이강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삼공산에 오르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눈앞에 펼쳐진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은 경치에 감탄하며 사진촬영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붉은색 전통의상을 입은 한 무리의 여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정상을 가득 메우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가이드를 통해 물어보니 자신들은 좡족(장족;壯族) 사람들이며 아주 오래 전부터 삼공산 구경을 소망해 왔던지라 15시간이나 걸려서 지금 이곳에 당도한 것이라고 했다.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좡족 여인들은 흔쾌히 포즈를 취해주었다. 그 사이 좡족 남자들이 한켠에서 전통 악기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좡족 여인들은 어느새 두 줄로 정렬하더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들에게 자신들의 전통 무용을 보여주려는 공연이라기보다는 고대하던 삼공산 등반을 자축하는 조촐한 기쁨의 의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삶의 소중한 순간을 소중하게 보내기 위한 자신들만의 익숙한 방식인 듯 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내 삶의 특별한 순간 춤을 추어본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새삼스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고국에서 수천 리 떨어진 낯선 땅 위에서 문득 춤 없이 적막했던 내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좡족 여인들의 춤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화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춤에 대한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영화 한두 편씩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주인공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때로는 용기를 주고 때로는 위안을 주는 그런 영화 말이다. 내 경우에는 ‘희랍인 조르바’이다.
지성적이지만 문약(文弱)한 젊은 소설가 ‘버질’이 집안의 어른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버질은 그 돈을 가지고 그리스의 크레타 섬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늙은 사내 ‘조르바’를 만나게 된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은 함께 광산업에 도전하기로 의기투합을 했고 어느 해변가의 작은 오두막에 자리를 잡는다. 그곳에서 조르바는 버질에게 삶의 스승이 되어준다. 버질은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도 숭고한 일인지를 배웠고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사는 법도 배웠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춤을 추는 법’만은 배우지 못했다.
두 사람은 밤마다 술잔을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조르바는 흥취가 오르면 밖으로 뛰쳐나가 춤을 추었다. 하지만 버질은 조르바가 아무리 졸라대도 그저 웃기만 할 뿐 동참하지 않았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껍질을 깨기 위해 멀리 크레타섬까지 떠나왔지만 책상물림이었던 자신을 완전히 벗어던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조르바는 버질에게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산에다 케이블카를 설치해 벌목한 나무를 운송하면 막대한 인건비를 절약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버질은 남은 돈을 모두 투자해 케이블카를 건설했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운송되는 나무들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케이블카의 기둥들이 도미노처럼 모두 쓰러져버린 것이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모두 도망쳤고 그 자리엔 조르바와 버질 두 사람만 남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버질이었다.
“조르바, 나에게 춤을 가르쳐줘요.”
마침내 그에게도 춤을 춰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춤을 가르쳐 달라구요?”
조르바는 벌떡 일어나며 기뻐한다. 그는 손가락을 튕겨 즉석에서 리듬을 만들어냈고 두 남자는 그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조르바는 더없이 즐겁고 상쾌하다는 듯이 깔깔대며 춤을 추다가 문득 버질에게 묻는다.
“이봐요 보스, 세상에 이보다 더 멋지게 망해버린 사람들이 또 있겠소?”
조르바는 내 젊은 날의 우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조르바처럼은 살 수 없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춤으로 표현하지도 못했고 위기에 직면했을 때 원초적인 생명의 에너지를 내뿜으며 당당하게 맞서지도 못했다.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르바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좡족 여인들의 그 춤이 다시금 그를 떠올리게 만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제 춤을 추기엔 너무 늦은 것일까? 아니다. 나는 춤을 추는 법을 모르지만 춤의 본질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는 것. 머리로만 살지 말고 몸과 마음으로도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춤을 추리라. 좡족의 여인들처럼, 버질과 조르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