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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언제 누가 심었는지도 모르는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양 길가에 줄지어 늘어 서있는 마을, 바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이다. 태고부터 뭇 생명들을 길러 낸 어머니 젖줄 같은 감천내가 흐르는 마을, 냇물 따라 길게 펼쳐진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소 풀 뜯기고 기마전도 하고 씨름을 하다가 냇물로 달려가 알몸으로 풍덩 뛰어들어 물장구 치고 자맥질도 하며 놀다 보니 어느새 친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나 혼자 냇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큰 소리로 친구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다 꿈에서 깨어났다. 아무리 잠을 자려해도 꿈에서 본 고향마을이 눈에 아롱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숨을 길게 내쉬며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 반, 더듬더듬 라디오를 켜니 ‘세월 따라 노래 따라’ 방송이 흘러나온다. 꿈에 본 고향 마을이 선명하게 떠올라 잠은 천 리 만 리 달아나 버린다.
잠이 날아간 이른 새벽 이런 저런 사연을 가슴에 품고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노래 오기택의‘고향무정’이 갑자기 떠올랐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있네.”
이 노래를 가수 오기택이 얼마 전 Kbs ‘가요무대’ 시간에 병상의 몸으로 휠체어에 의지한 채 무대에 나와 다른 가수가 대신 부르는‘고향무정’을 입만 달싹거리며 부르는 모습에 모두가 눈시울을 붉히며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냈는데 어느새 세월이 흐르고 보니 고향무정이 인생무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 시절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고향 무정’은 허무적 색채가 짙다는 이유로 당시 권력층으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한 노래이다. 그 옛날 유년의 골목길을 거닐면서 옛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다.
올해도 추석을 앞두고 열차표 예매는 시작한 지 채 몇 분이 안 돼 표가 매진되고 말았다니, 도대체 고향이 무엇이기에 그렇게도 애타게 그리워하며 찾는 것일까? ‘고향’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태어나 자라난 곳. 또는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내 아들 세대들에게는 고향이라는 낱말이 어떤 말인지……. 그리고 얼마만큼의 짙은 추억들이 묻어날 것인지 관심 밖의 단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들먹일 수 있는 마지막 세대는 바로 지금의 우리가 아닐까 생각하니 어째 씁쓸하기까지 하다.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조상도 부모도 친구도 고향도 필요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으니……. 하기야 세상이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변해 버린 현실에 고향에 대한 미련을 강요하는 것도 무리한 일이지만 아직도 고향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허물어지고 누추한 시골집이 더없이 정겹고 소중할 수 있다. 마음은 아직도 어린 시절 그 모습 그대로인데 어느새 불혹(不惑), 종심(從心), 회갑(回甲)을 오래 전에 이미 넘기고 고희(古稀)마저도 훌쩍 넘고 말았으니……. 어지간한 모임에 가면 최고령자에 해당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어릴 적, 그렇게 많았던 친구들은 먼 곳, 아니면 영원히 먼 곳으로 떠나가고 집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데 회관에만 할머니들 몇 분이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할 뿐, 온 마을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짓누르고 있어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지만 고향이 그리운 건 아마도 향수병일 듯싶다.
아주 어릴 적 낮에는 재기차기, 자치기, 등으로 해가 질 때까지 놀았고 저녁이면 친구 집에 모여 희미한 호롱불 켜놓고 종이딱지, 성냥개비 알 따먹기로 시간을 보냈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여학생들과 어울려 밥도 해 먹으면서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낸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죽을 때는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향한다는데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리움이 오늘따라 이른 새벽에 꿈을 통해 글로 이어지게 한다. 아무도 읽어 주지 않아도 그저 나 자신의 유년의 기억들을 더듬어 보는 가슴 따뜻한 새벽시간이다. 고향엔 많은 언어들의 색깔이 쌓여 있는 곳, 낙엽을 밟던 그리움의 색깔이 있고 골목길 추억의 색깔이 있다.
고향은 눈으로만 보는 색깔 뿐 아니라 가슴속에 그려 넣을 그림의 모든 색깔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훈훈한 정이 담기는 감동의 항아리 속에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함께 담는 곳, 소중했던 꿈들이 뿌연 안개처럼 사라져갔지만 동심의 꿈이 가득 가득히 쌓여 지는 곳, 그래서 고향은 꿈을 꾸고 마음으로 만져보며 가슴으로는 느끼는 곳이다. 이웃과 이웃이 마주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곳, 서로가 보이다 안보이면 불안하고 아쉬워 서성이는 곳, 그래서 고향은 눈으로 흘기면서도 가슴으로 정을 주며 사는 곳이다.
꿈을 꾸며 서로의 인생을 챙겨주는 곳이기에 고향을 찾게 된다. 성주와 인접하고 있는 고향에는 요즈음 사드 설치 문제로 온통 난리다. 이 모두가 생존권 차원을 넘어 고향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겠는가? 오기택의 ‘고향무정’을 쓸쓸하고 황량한 노래로만 보지 말고 가슴으로 정을 주는 노래로 승화시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