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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김천역을 빠져나오면 역전 광장 왼쪽에 뉴욕제과점이 있었다. 양옆에 새시(sash)로 만든 진열창이, 그 가운데 역시 새시로 만든 출입문이 있었다. 출입문 오른쪽에는 스티로폼으로 만든 모형 케이크를 늘 진열해 놓았고 왼쪽에는 주방이 있었다. 오후면 기울어진 햇살이 들어오는 바람에 차양을 드리워야 했다.” (김연수의 소설 ‘뉴욕제과점’ 중에서)
지금은 없어졌지만, 김천역 광장 왼편에 있었던 뉴욕제과점은 김천 출신 작가 김연수가 자랐던 집이다. 작품 ‘뉴욕제과점’은 소설의 형식을 빌리기는 했지만, 작가의 성장 체험과 사실들이 그대로 들어 있어서 허구라고 할 만한 대목이 거의 없다. 그런 탓인지 이 작품에는 지금은 사라진 ‘가까운 근대 김천’의 모습이 진경(眞景)으로 그려진다. 그냥 리얼하기만 한 진경을 넘어서서 형용할 수 없는 내면의 정서적 분위기까지도 근사하여 참으로 진경이다. 그 옛날 명절 대목의 김천역, 야간열차에 내려 고향 김천으로 돌아오던 타관의 김천사람들, 그들이 역 광장을 건너와 마주치던 역전 가게들의 모습, 이 대목 묘사를 읽다 보면 이미 근대 저편으로 가버린 김천의 표정이 친숙하게 다가온다. 한 번 더 인용해 본다.
“대목 장사를 바라고 제과회사나 양조회사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조잡한 디자인의 포장지에 싸여 상점 앞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종합선물세트, 혹은 경주법주나 백화수복 같은 것들. 서울이나 울산이나 대전이나 대구 같은 대도시 생활의 고단한 표정일랑 빈집에 남겨두고 내려온 귀성객들이 홍조 띤 얼굴로 말끄러미 들여다보던 선물세트 견본품 비닐 위에서 번득이던 백열등….”
김연수는 한국 소설의 좌표 하나를 점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1994년 ‘작가세계 문학상’을 받은 이래, 꾸준히 진지하게 작품을 써 왔다. 나는 2005년 여름, 중국 연변대학 교정에서 그를 우연히 지나치듯 만났다. 그는 장편 ‘밤은 노래한다’를 구상하며 여러 달째 연변에서 취재 중이라 했다. 나는 내 일행에게, 김연수를 장차 한국이 자랑해도 좋을 작가라고 했다. 사람들이 동의했다. 그가 앞으로 창작할 작품들의 가능태(可能態)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가 지금 내 나이쯤 되면 그는 아마도 더 의미 있는 문학적 성취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당연히 김천이 자랑해도 좋을 작가이다.
2002년에 낸 그의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는 ‘뉴욕제과점’을 포함한 모두 9편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유독 ‘김천의 표정’을 잘 담고 있다. 물론 작가는 김천의 표정을 담으려고 작품을 쓰지는 않는다. 작품 형상화 과정에서 그의 성장 체험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이리라. 이들 작품에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 김천이 겪어낸 사건과 풍물과 김천사람들의 정서적 표정들이 잘 어우러져 녹아 있다.
생각해 보면 이 시기도 어느새 아련한 과거가 되어가고 있다. 그 아련한 과거는 이제 ‘가까운 근대’로 불릴 것이다. 1960년대 이전이 비교적 ‘먼 근대’로 밀려나면서, 이제는 30~40년 전의 시간이 ‘가까운 근대’의 범주로 들어간다. 시간은 늘 그런 모양으로 퇴적된다. 아니, 시간이 퇴적된다기보다는 우리의 기억이 퇴적되는 것이리라. 이런 기억의 퇴적을 두고, 작가는 뉴욕제과점의 기억들이 그에게는 내면의 불빛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근대의 것들 가운데 김천이 기억해야 할 유산과 유적들을 챙겨야 할 때이다. 김천이 생성한 ‘근대의 문화유산’을 찾아내어 가치를 매겨야 한다. 이들을 보존하고, 가꾸는 일은 현시점에서의 새로운 문화적 과업이다. 뉴욕제과점이 있던 자리를 떠올리며, 그 자리가 주는 문화적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