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침략하 최대의 항일 민족항쟁인 3·1운동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발발했다.
김천에서도 개령면 독립만세운동 등 다섯 번의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계획단계에서 발각돼 시행으로 옮겨지지 못한 세 번의 시위시도가 있었다. 이외에도 대구 3·1운동과 6·10만세운동 등에 김천시민들이 동참했다.
또 이번 호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김천공립보통학교(김천초) 2학년생 임원성(당시 17세)이 ‘대한독립만세 일본패망’이라고 쓴 글을 박문학이란 가명으로 일본군 헌병분대에 투서해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한 사건도 있었다.
이에 본지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고장 선조들이 불굴의 의지와 피땀으로 지켜낸 조국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그분들의 숭고한 얼을 되새겨 후대에 계승하고자 이번 호에 지역의 만세시위운동에 대해 알아본다. 또 3월 한 달 간 ‘3·1운동 100주년 기획특집’으로 김천인들의 항일독립운동 활약상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한반도 남부의 중앙에 위치한 김천은 예부터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의 접경에 위치한 지리적 입지로 위해 일찍이 교통이 발달했다.
사통팔달로 대표되는 지리적인 이점은 필연적으로 팽창하는 세력 간 충돌점이 됐고 삼한시대에는 마한, 진한, 변한,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 가야 간의 크고 작은 격전장이 됐다.
특히 김천지역에 자리 잡은 삼한시대 변한계 소국 감문국(甘文國)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斯盧國)과의 전쟁과정에서 멸망했고 고려시대에는 무인정권에 환멸을 느낀 대문장가 임춘(林椿)이 김천으로 낙향해 가전체 문학의 꽃을 피웠다.
여말선초에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부르짖으며 수많은 선비들이 벼슬을 버리고 김천으로 낙향해 은거하는 등 불의(不義)에 타협하지 않는 뿌리 깊은 반골(反骨)의 기상이 모인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과 자부심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말의병운동 등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빛을 발했다.
국권을 상실한 일제강점기에는 만세시위운동과 무력항쟁, 민족사학 설립과 언론, 청년, 여성운동을 통한 민중계몽활동, 종교 및 정치결사단체 활동 등 다방면에서 치열한 국권회복활동을 전개해 김천에서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해냈다.
1919년 김천 방방곡곡에 울려퍼진 민족의 함성
종교계, 학생, 주민 불길처럼 일어나 감문산·만천봉 등에서 만세 시위 운동
1. 황금동교회 만세시위 계획
1919년 3·1 만세시위가 서울에서 일어나자 그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퍼지기 시작했다. 김천에서는 황금동교회 김충한(金忠漢·당시 36세·계성학교 출신)이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김천에서도 거사를 단행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3월 8일 대구에서 크게 벌어진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주로 학생이 참여했는데 이에 참가했던 김수길(金壽吉·18세·증산면 금곡리·계성학교 학생)이 김천에서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그 길로 김천으로 달려와 황금동교회로 김충한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때마침 장로 최용수와 교회 신도 한명수도 함께 있었다. 김수길은 대구 학생 의거 소식과 세계정세를 설명한 다음 조선 독립의 좋은 기회임을 강조하면서 김천 거사를 제안했다.
김천에서의 거사를 결심하고 있던 김충한은 두 사람과 의기투합해 밤 9시에 다시 황금동교회에 모였는데 이 자리에는 주남태(21세·남산동·농업), 김원배(23세·용호동), 박태언, 차경곤(21세·황금동·재봉업) 등이 동석했다.
김충한, 김수길은 독립운동에 관한 경고문을 작성하고 최용수, 김수길, 박태언은 인쇄를 맡고 인쇄물 배포는 김수길, 박태언이 담당하기로 했다. 또 경고문에 김천 거사의 민족 대표로 김충한과 최용수의 명의로 인쇄한다는 데에 합의했다.
거사일은 3월 11일 하오 3시, 장소는 용두동 감천다리 부근으로 정하고 김수길은 베(布)로 태극기를 제작, 주남태·김원배는 종이로 많은 태극기를 만들어 두기로 했다. 거사의 순서는 군중이 모이면 먼저 조선 독립에 관한 연설로 시작해 모인 군중에게 경고문과 종이 태극기를 나눠 주고 베로 만든 태극기를 선두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가를 행진하기로 했다. 모든 세부 계획이 끝나고 10일부터 본격적인 준비를 서둘렀다.
3월 10일 김충한과 김수길은 황금동교회에서 “금번 만국평화회의의 좋은 기회를 맞아 우리 조선은 독립할 운이 왔음을 고한다. 우리는 타국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민이 되어 천부의 행복을 누려야 한다”로 시작하는 내용의 경고문을 기초했다.
그날 밤 남산동 최용수의 집에 모여 은행에서 빌려온 등사판으로 경고문 300장을 등사했다. 또 주남태, 김원배는 종이 태극기 50여 본을 만들어 10일 오전 9시 황금동에 있는 한상태의 집으로 운반해 김천공립보통학교(김천초등학교 전신) 학생 한정이, 석동준(20세·용호동·어물상), 학생 박희철 등에게 나눠주면서 다음날 거사 장소에 모이도록 했다.
석동준은 11일 이들로부터 받은 태극기 16본을 들고 김천공립보통학교로 가서 학생 김종호 등에게 나눠주면서 오후 3시에 의거 장소에 참가하도록 하고 한명수(27세·황금동교회)는 교동의 교회로 달려가 교동에 사는 김재위(36세·농업), 허학선 등에게 의거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사일인 11일 오후 3시 경고문을 등사한 등사기를 돌려보내는 사람의 뒤를 미행하던 경찰에게 등사 원고지가 발각돼 황금동교회에 모여 있던 주동인물 4명이 검거되면서 계획했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연루된 많은 사람이 검거돼 재판에 회부됐다.
5월 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김충한(金忠漢·징역 2년), 김원배(金元培·징역10개월), 최용수(崔龍洙·징역 1년 6개월), 한명수(韓明洙·징역 10개월), 주남태(周南泰· 징역 10개월), 김재위(金在緯·징역 6개월)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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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동교회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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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두동 시위운동
1919년 3월 11일의 제1차 김천에서의 독립시위거사가 탄로 나자 일본경찰의 경계는 더욱 삼엄해지고 무장한 기마헌병대가 동원돼 시가지를 누비면서 물샐틈없는 경계망을 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울분을 참지 못한 김인수, 김윤상, 최응수, 김영훈 등 청년 20여명이 3월 24일 밤 11시에 감호동 조일영 집에 함께 모여 있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들은 경찰에 체포돼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각각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3. 개령면 독립만세 운동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을 갈망하는 민족의 함성이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자 개령면 동부리 주민들은 3월 24일, 4월 3일, 4월 4일, 4월 6일 등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독립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벌였다. 제1차 시위를 한 3월 24일은 개령보통학교(개령동부초등학교) 졸업식인 동시에 학부모 은창서의 집 혼인 잔치로 사람이 많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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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령초등학교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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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연 도중에 김태연(金泰淵.일명 김단야)의 주동으로 허철, 전종수, 최영돈 등은 전국 각지에서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고장에서는 이런 거사가 없는 것은 수치라 하며 거사하기로 합의하고 4시가 되어 피로연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연설을 했다. 이들 4명이 선두에 서서 유동산을 향해 행진하니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시위 대열에 참가해 시위대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잠시 후 무장한 헌병 기마대가 달려와 선두를 가로막고 총을 쏘아 흩어졌는데 그 가운데 2명이 체포됐다. 이 일로 김태연, 허철, 전종수, 최영돈이 재판에 회부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제2차 시위는 4월 3일 개령면 동부리에 사는 문정환이 동료 2명과 마을 뒷산인 감문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불렀고 제3차 시위는 4월 4일 문정환, 홍득린, 문학이 등이 감문산에서 만세를 불렀다.
제4차 시위는 4월 6일 밤 동부리에 사는 주민들이 주모했다. 역시 횃불을 들고 감문산에 올라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했는데 이에 가담했던 김임천, 도동영, 김명길, 최가만, 정남준, 황도석, 이말용, 윤광어리, 김타관 등 9명이 검거돼 재판에서 90대의 태형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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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문산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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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증산면 시위 계획
증산면에서도 거사계획이 있었는데 면소재지인 유성리 옥동마을에 있었던 쌍계사의 승려 이봉정, 김도운, 백성구 등이 1919년 4월 5일 밤 평촌리 뒷산에서 시위운동을 하기로 하고 군중 동원을 위해 증산면 유성리 동장 최상철과 평촌리 동장 김도원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면서 주민동원을 부탁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거사 직전에 누설돼 주동 인물 가운데 이봉정, 김도원이 검거, 재판에 회부돼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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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면 유성리 옥동마을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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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독교·천주교 연합 만세운동
김천지역 기독교와 천주교 신자들은 1919년 3월 20일 밤에 일제히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20일 밤 8시를 기해 황악산에서 횃불을 올리면 이를 신호로 시내에서 신도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시내 곳곳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했다. 밤 8시에 횃불이 올랐으나 시내에는 헌병과 경찰이 거리 뒷골목까지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어 신도들이 한 장소에는 모일 수가 없었고 산발적으로 곳곳에서 만세소리가 울려 퍼져 12시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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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천봉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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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봉산면 상금리 만천봉(萬千峰) 만세시위 운동
봉산면 상금리 마을 앞 만천봉에서도 인근마을의 주민 수십명이 모여 만세시위운동을 펼쳤다.
1919년 4월 1일 정오를 기해 만천봉에서 인근 주민이 모이기로 하고 상금동 주민 이근욱이 어모면 다남리 참나무골로 독립운동가 편강렬을 찾아가 태극기 한 장을 구해 숨겨와 동네 어른들이 사기점마을에 은신하면서 무명천에 태극기를 베껴 그리며 거사일을 기다렸다.
4월 1일 정오가 되자 동민들이 만천봉 정상에 모이기 시작했다. 주민 이덕필이 취지를 설명하고 동민 김병철이 일제의 야욕을 성토한데 이어 동학난에 가담한 바 있는 조도봉이 모아 놓은 청솔가지에 불을 붙이니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동민들은 감격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목이 쉬도록 처음 불러보는 만세 소리는 울음소리로 바뀌어 모두 부둥켜안고 봉화가 다 타도록 울부짖었다. 만천봉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있은 지 3일후에 주동자는 모두 체포돼 16명이 머리를 깎이는 수모를 당했으나 이튿날 방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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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면 평촌리 장뜰마을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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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양천동 하로마을 만세운동 계획
3·1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양천동 하로마을에서도 이석동이 경영하는 서당 ‘하신정’에서 시위운동을 준비하면서 참가하는 동민들에게 배부할 태극기를 다량 제작하고 있었는데 김천군청 관리가 일경에 밀고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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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로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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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천헌병대 만세시위
서울에서 있었던 3·1 독립시위운동의 소식을 들은 조마면 신안리 주민 최무길은 4월 5일 오후 8시 혼자서 평화동에 있는 일본헌병분대 구내에 들어가 “대한독립 만세!”를 세 번 외치고 그 자리에서 체포돼 모진 매를 맞고 재판에 회부,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김민성 편집국장
tiffany-ms@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