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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현대수필의 출발-김천 수필문학의 출발을 이야기하다(중)

민경탁 논설위원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0년 10월 29일

지역사회 현대수필의 출발
김천 수필문학의 출발을 이야기하다(중)

민경탁 논설위원


정건양은 ‘김천문화의 집’ 초창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여 수필을 발표하다가 동인지 『소문화』가 창간되며 자주 수필을 발표했다. 그는 김천 수필문학의 초석을 놓았다.

근대 김천문학은 『무명탄』(1930) 『웅계』(1939) 『흑조』(1939) 등의 문예동인지에서 출발했다. 『무명탄』(조선문예협회, 1930.1.20)은 엄필진 외 37명의 김천지방 무명 시인들이 주축이 된 동인지이다. 편집진은 김천에 두고 서울에서 발행했는데 시 19편, 소설 1편, 희곡 1편, 수상 1편, 수필 6편, 기행문 2편, 평론 3편, 잡문 등으로 편성돼 있다. 대다수 작품이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좌익 이념화된 작품들이다.

일제강점기 말 종합문학지 『문장』이 폐간되자 김천의 김연만이 속간해 내었다(1941). 지역사회 김천은 그만큼 문학 열기가 뜨거운 고장이었다. 이 때 김천고보 교장으로 재직하던 정열모 국어학자의 산문 「입학」이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었다.

현대 김천문학은 『오동』(김천오동시문학구락부, 1947) 『소문화』(김천문화의집, 1955) 『벽과 눈』(벽과눈동인회, 1956) 『벽파』(벽파동인회, 1958) 『흑맥』(흑맥문학회, 1959) 등이 발족되면서 꽃피워졌다.

『오동』은 시문학 지망생 저변을 확대하며 배병창, 정완영 같은 시인을 배출했다. 동인지 『소문화』는 1978년까지 25집을 내며 지역사회 문학인구 저변확대와 문학 작품 발표 공간을 제공하면서 지역사회 문화예술 활동의 본산이 되었다. 이 무렵 김천의 문학인을 총망라한 단체로서 가장 화려하게 활동을 한 단체가 흑맥문학회다.

김천에서 정건양의 뒤를 이어 현대수필 성향에 부합하는 글을 쓴 문인으로 도양 김기환(金基煥1930~1969)이 있다. 호를 도양(島陽) 또는 석초(夕草)로 쓴 그는 『소문화』 『벽과 눈』 『흑맥』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소문화』와 『현대문학』지에 수상(隨想) 「돌풀」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수필 활동을 펼쳤다. 정건양의 「가을과 나와」(『소문화』1956.12)와 김도양의 「돌풀」(『현대문학』 1961.8~1962.1)의 전반부를 소개한다.


가을과 나와
정건양

나뭇잎들이 붉으스레 홍조된 빛으로 변색돼 갑니다. 애처로운 호소나 할 듯 나는 뒷산에 기어올라 봅니다. 아이들이 양지에 모여 소꿉장난이 벌어졌습니다. 나는 늙은 소나무 그늘에 앉아 새파란 하늘을 응시합니다. 내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어 가고 아직도 붉은 피가 용솟음 쳐야할 심장은 새파란 여적을 남기며 줄곧 다름 질치는 듯합니다.

이렇게 내 마음에 가을이 깃들면 고독보다 행복한 자위(自慰)의 서글픈 눈물이 두 뺨을 적셔주나 봅니다. 무엇에 쫓기어 지친 몸이 절망의 심연에 부딪쳐 멍하니 운명을 기다리는 옹졸한 인간 이하의 동물일 따름 …… .

나무들이 죽지 않는다는 의지를 지니고 새빨간 단장으로 생을 과시할 때 나만이 이렇게 초연의 비애를 느껴야 할 것인가요? 인생이란 행복을 찾아 헤매이다 죽어가는 것이라지만 나는 이 동산에 앉아 머언 하늘과 새파란 코발트빛에 도취되어 이 세상에 나 하나만이 살고 나 하나만 끝없는 희망이 있는 것처럼 들국화의 향기를 마시며, 옛 벗 옛 사랑 아직 보지 못한 머언 나라의 꿈을 꾸어보면 진정 행복스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나는 아이들이 옆에서 소꿉장난을 하며 공주가 되고 왕이 되고 왕자가 되어 건드릴 수 없는 엄숙한 세계를 만들고 있을 때 거기 공주와 왕자가 애인 것처럼 눈을 조용히 감아봅니다. 용좌에 앉아 백관을 호령도 하고 신선이 되어 구름을 타고 속세의 중생을 내려다보며 껄껄 소리 내어 웃어도 봅니다. 벌레 먹은 샛노란 낙엽 하나가 이마를 스쳐 떨어지면 나의 꿈은 깨어지고 칠색의 호사스런 빛은, 갖은 악귀들이 나를 끌고 홍진과 잡소(雜騷)에 쌓인 속세로 떨어지게 합니다.

거기가 바로 내가 사는 인간사회라는 곳인가 봅니다. 시기와 증오와 살기 찬 눈들이 나를 엄습하고 나는 또 숨 가삐 쫓기어 다녀야 할 것입니다. 가을이 짙어 가면 낙엽이 우수수 산골짝에 떨어질 것입니다. 내가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곧 안 죽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맥이 뛰고 사념이 있으니 또 가을을 즐길 수 있겠지요.

만추의 오후 깊은 산 단풍진 숲 사이로 바삭바삭 낙엽을 밟으며 그림자 벗 삼아 거니는 맛이란 감상적인 시흥보다, 시간보다 통쾌한 스릴이 있습니다. 황혼과 더불어 귀로에 거니는 논두렁길은 농부들의 희열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수확 쾌감이 있습니다. 시월 달 밝은 밤이면 바다도 좋고 호수도 좋습니다. 푸른 달빛이 싸늘한 바람에 실려 옷깃에 스미면 회상의 실마리가 한 올 두 올 풀리어 지고 붙잡을 수 없던 그대의 사랑마저 송두리째 품 안에 안기어지는 듯합니다. 그래도 밤이 새도록 호젓이 사색의 산책을 즐길 수 있습니다.

모두들 가을이 슬프다 합니다. 과연 슬픈 계절이기는 하겠지요. 나에게 주는 이 가을의 희열이 가상의 행복이 아닌 진실한 마음의 향수가 되고 보니 나의 가을은 외로이 생각하고 외로이 울어 볼 수 있는 정숙한 순간이라 하겠습니다. 남에게 거리낌 없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란 행복한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가슴을 풀어헤치고 마음을 이야기하고 서로 같은 일에 공통된 희비의 감정을 느끼며 목 놓아 울어보아도 쑥스럽지 않던 벗, 내 일처럼 정의를 위해 싸워주던 벗, 서로 짝사랑의 푸념을 하던 벗, 모두가 어디론지 홀홀히 떠나버린 뒤 나는 이 가을을 호흡하며 수많은 정우(情友)들이 숨어 있을듯한 허망한 꿈길을 다름질쳐봅니다. 어느 산골짜기 실개천 위에 새빨간 낙엽 하나 떠내려가는 시간입니다. -『소문화』(1956.12.1)


돌풀

김도양

천재
천재란 인생에 등불이 될 수도 있고 또한 인생 최대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고독에 대하여
수십 억의 사람들 중에 나와 똑 같은 사람은 없다는, 혼자일 뿐이라는 이 무서운 고독. 그리고 적료하지만 수십 억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될 수 있을 때 고독은 환희와 더불어 고스란히 녹아버리지 않는가.

ⓒ 김천신문


죽음에 대하여
죽음을 겁내지 마라. 만일 우리 인생에서 죽음이 영원히 없다는 걸 생각해 보라. 그 얼마나 답답하고 권태로운 구속에 미칠 듯한 몸부림이 해일처럼 끊임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허구 많은 시간이 있었고 또 사람들이 있었으며, 우리가 또 이 세상을 고별한 뒤에도 허구 많은 시간이, 사람들이 존재하겠거늘 어이 요렇게 때와 곳을 같이하여 서식하고 있다는 걸 생각할 것 같으면 여기 우리가 무슨 증오가 있겠으며 여기 무슨 상극이 있겠으며 여기 무슨 싸움이 있겠는가.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우리가 요렇게 알뜰히도 만났겠는가. 이렇게 만나서가 아니라 우리는 이제 우리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을 것이요 또 우리를 떠나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참 그러고 보면 요렇게도 한 세상 알뜰히 만났는데도 죽을 때까지 그야말로 말은커녕 얼굴 한번 맞대어 보지 못하고 사별하는 사람들이 이 땅 위에 그 얼마나 많은가.
비단 그뿐이랴. 서로 옆에서 밤낮 얼굴을 쳐다보며 살아가는데도 자기 인생에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떠나는 사람들도 허다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잠자다 깨어 문득 떠오를 때 소름이 끼치도록 이 세상이 무서워지고 고독해지는 걸 어떻게든 할 수 없다. 또 곰곰이 생각을 펼쳐보면 자기가 한 평생 살아가는데 끝내 자기에게 직접 간접으로 자기에게 이롭게만 노력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끝내 자기에게 해만을 끼치는 사람이 있지도 않는가.
그래서 사람은 자기를 중심하여 남을 평하게 되고 가치 판단을 내리므로 기쁨이 생하고 슬픔이 생하고 악이 발하고 감사가 우러나오곤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 도가 심하여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투기하고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참변이 발생할 때 새삼 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도 역시 사람은 사람이 그립고, 사람은 사람이 있어 믿음직하고, 사람은 사람들로써 힘이 나고 그래서 인생은 진보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눈뜨곤 물론 눈을 감아도 환상이 아른거리며 구역질이 날 정도로 보기 싫은 추남도 표류되어 절해에서 고도에서 만났을 때 미스유니버스도 쌍수를 들고 환성을 울리게 될 것도, 사람은 사람을 귀중히 섬기는 본능이 확고하게 내재돼 있어서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끼리 싸우고 못살게 굴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사람으로서 행세하기 전에 실로 사람을 귀히 섬기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할지어니 가만히 생각해 보라. 그대가 자기 자신을 그토록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그 이상으로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현대문학』(1962.7)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0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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