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의 역사인물강석구(姜碩龜) 강이무(姜履武) 부자
구성 광명리 기를 출신 이름난 유학자로 명성 벼슬에 연연하지 않은 참선비로 후세에 귀감 조선시대 유학자의 이상은 대체로 학문에 매진하여 과거를 통해 출사하고 입신양명하여 마침내 가문의 영예를 드높이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일신의 출세와 부귀공명을 쫓지않고 자기절제와 고고한 선비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이들도 많으니 그러한 이가 곧 구성 광명리 기를출신 강석구와 강이무 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석구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낙서(洛瑞) 호는 학암(鶴巖)이다. 아버지는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인 진환(震煥)과 여헌(旅軒)선생의 현손(玄孫)인 옥산장씨(玉山張氏)사이에서 차남으로 1726년 김천 구성 광명(기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자질이 뛰어나 보통 아이들과 차이점이 많았다.
놀기를 좋아하여 여러 아이들과 냇가에서 놀다가 사람 두골이 있는 것을 보고는 여러 아이들이 놀라 달아나거늘 공은 홀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두골을 옷가지로 싸서 묻으니 그 일을 전해들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공을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로는 독서에 잠심하여 종일토록 그치지 않으니 부친이 공이 병이 날까 두려워 서책을 모두 치우기를 반복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1768년(영조 44)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같은 해에 영조 임금으로부터 어필(御筆)을 하사받았는데 <今年臘月中旬日 甲戌干支誦戮莪(부모가 안 계심을 한탄하는 시경의 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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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구의 문집 |
이 어필첩 우측 상단에는 공에게 하사한 기록과 우측 하단에는 공이 직접 “임금의 글씨를 감춘 것을 9년 뒤 병신년에 열람하니 임금님의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으나 선어(仙馭)를 잡아 보지 못하니 슬픔으로 눈물이 흐릅니다.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기록하여 자손 대대로 보배로 삼노라”라는 1776년 9월 21일 쓴 발문이 있고, 좌측 상단에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쓴 발문이 있어 한층 더 어필의 품격을 높이고 있다. 1786년(정조 10)에 사헌부정언(司憲府正言)이 되었다. 한편 1789년(정조 13)에는 부사과와 승정원좌승지를 역임하면서 서원(書院)을 함부로 세워 백성들에게 폐가 많음을 상소하다가 조정의 미움을 받아 귀양지에서 별세한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을 위하여 죄를 풀어 줄 것을 상소하기도 하여 공의 강직함을 드러내었다. 1796년(정조 20) 임금에게 바른 학문을 밝혀 풍속을 두텁게 하고 과거의 폐단을 혁신하여 선비들의 습속을 바르게 하는 등 10개 조목의 시정안의 상소를 올려 비답(批答)을 들었으며 1797년(정조 21) 봄에 정조의 명으로 향례합편(鄕禮合編)과 향약(鄕約)을 반포(頒布)하라는 윤음(綸音)을 모든 군(郡)과 현(縣)에 내려 고루 행하게 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도움이 될 방법으로 삼으려 하였다. 1805년(순조 5) 한성우윤(漢城右尹)을 역임하고 다음해에는 부총관(副總管)에 1809년(순조 9)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공은 관직에 있으면서 “나라에 어려움이 있으면 녹봉(祿俸) 받기를 부끄러워하였으며 1810년(순조 10) 향년 85세로 별세하니 임금이 “자손대대로 청백리 집안으로 이어가라” 하면서 제문과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世襲簪纓 대대로 관직을 계승하여 家傳淸白 집안에 청렴함이 전해지네. 樂寓簞瓢 거친 음식 즐거이 먹으며 學宗閩洛 주자학을 으뜸으로 배웠네. 그 후 1923년 유림들의 청원으로 자동서원(紫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행장(行狀)은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이 쓰고 묘지명(墓誌銘)은 지애(芝厓) 정위(鄭煒)가 짓고 묘갈명(墓碣銘)은 매당(梅堂) 이만좌(李晩佐)가 지었으며 구성출신 여재동(呂載東)이 썼다. 묘소는 김천 남면 초곡리 봉화산자락에 위치하며 유집으로 『학암집(鶴巖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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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무 시집 시집 국역본 |
강이무(姜履武)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용인(龍仁) 호는 치헌(恥軒)이며 아버지 학암(鶴巖) 석구(碩龜)와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김천 조마 강곡(강평마을)에서 1772년 태어났다. 양부는 석호(錫虎)이다. 가학을 전수받아 성리학을 연찬하였고 선고(先考)께서 집필한 『심경(心經)』으로 공부하여 재예가 탁월하였으나 산수를 즐겨 벼슬길엔 나아가지 않았다. 1820년(순조 20)에 조마의 백화동에서 인근의 아홉 노인들이 모여 시주(詩酒)로 풍류를 즐기는 구로시사(九老詩社)를 결성하고 조마 염속산 철수동에 구로재(九老齋)를 지어 자연과 벗하며 향산고사(香山故事)를 모방하였으며 구로시사 시집이 지금도 전해져오고 있다.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를 지키며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1833년 별세했다. 구로시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진다.
蓮社同携杖 연사(蓮社)에 함께 작지 이끌고, 花齋更剪燈 화재(花齋)에 다시 전등(剪燈)하네 一樽詩話足 한 두루미 술에 시화(詩話)가 만족하니 興入碧山層 흥취로 벽산의 층계에 들어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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