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회주의운동 연구 김천학에서 다루어져야 할 주요한 삶의 양상으로 일제강점기와 근현대 전개된 사회주의운동을 제시한다. 김천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 중 한 곳이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인물로는 김단야(金丹冶, 본명 金泰淵)와 황태성(黃泰成, 黃太成, 일명 黃大用) 등을 들 수 있다. 김단야는 1899년 1월 16일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에서 태어나, 1906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908년 4월 고향의 개진학교에 입학하고, 1909년 4월 진명학교로 옮겼고, 1910년 4월 영진학교에 들어가 1914년 보통학교 과정을 마쳤다. 1915년 3월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6년 12월 미국인 교장과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과 체벌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하였다. 경성의 배재학교 재학시절인 1919년 3월 말 고향 김천 개령에서 3・1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 김천지회에서 태형 90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비밀결사 적성단(赤星團)에 들어가 활동했으며, 1919년 12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다. 1921년 3월 상해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여해 집행위원이 되고, 1921년 8월 고려공산청년단 책임비서로 선임되고, 또 화동학생연합회 서기가 되었다. 1921년 10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당하였다.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와 극동청년대회에 고려공산청년단 대표로 참가하고, 2월 20일에 레닌과 회견하였다. 1922년 3월에 상해로 돌아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상해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한 김단야와 빅헌영 그리고 임원근은 ‘삼인당’이라 불리었다. 김단야는 1922년 4월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국내로 이전하기 위해 입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24년 1월 출옥하여 고향 김천에서 요양한 후, 조선일보 기자로 취직하였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에 참여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고, 한양청년연맹과 화요회에 가담하였다.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언론사 기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으며, 이들은 ‘화요파 트로이카’라고 불렸다.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을 맡았고, 4월 17일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 9월에 조선일보사에서 해직되고, 1925년 12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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