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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그리고 김천지역에서 또 한 명의 주요 사회주의 운동가인 황태성은 1906년 4월 27일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1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했으나, 1924년 일본인 교장을 배척하는 동맹휴학사건으로 퇴학당했으며, 1925년 경성의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1927년 조선공산당 경북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김천지역에서 신간회 활동했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 경성지역 총지휘자로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2년 복역하였다. 출옥 후 김천에서 다시 활동하다가 1935년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3년 6개월 복역하였다. 해방 직전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의 전라남북도 책임자로 맡았으며, 1945년 해방후 조선공산당으로 활동하다 1946년 10월 월북하였다.
한편 김천지역에서는 1919년 3・1운동 이후 여러 청년단체가 조직되었다. 1921년 8월에 고덕환 등에 의해 조직된 ‘금릉청년회’가 그중의 하나이다.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를 계기로 청년회들이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 단체로 변화하였다. 금릉청년회도 시대적 조류인 사회주의적 조직체계로 변화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뒤 김천지역도 사회주의 성향사회단체와 사상단체들이 속속 창립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것으로 독서구락부와 김천형평청년회가 있었다.
1927년 6월 26일 김천청년동맹이 창립되고, 군에는 청년동맹을, 그리고 면에는 동맹지회를 조직해 나갔다. 금릉청년회는 김천청년동맹 김천지회가 되었으며, 1927년 8월에 김천청년회가 김천청년동맹 금릉지회로 조직되었다. 1927년 9월 24일 김천청년동맹 농남지회가 창립되었고, 1927년 9월 25일에 김천청년동맹 증산지회가 조직되었다.
1928년 1월 8일 경북청년연맹이 창립되었을 때, 김천지역 청년운동의 핵심 인물들이 대거 참여해, 집행위원장 홍보용, 집행위원 황태성이 선출됐다. 1928년 ‘12월테제’ 이후 김천 활동가들은 ‘볼세비키적 전위당’ 건설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에 입각한 운동론을 받아들여 지역 단위의 정치기구건설이 선행돼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에 김천지역의 당재건운동일환으로 1931년 2월 21일 김천그룹이 조직되었다.
기존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김천의 사회주의운동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① 김천에서 파벌 타파에 지역 많은 운동가들이 노력했다. ② 민족주의계열과 적극적인 협동전선을 모색했다. ③ 지역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당면한 생활문제에 대처했으며, 이를 통해 현실 대중조직들을 혁명적 계급운동에 참여시켜 나갔다. ④ 1930년대 전개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도 실제 존재하는 일반대중조직을 자신의 조직체계 내로 끌어들여 혁명적 투쟁을 전개했다. ⑤ 계급운동과 혁명운동을 기본목표로 하지만, 최우선적으로 민족적 이익을 위해 운동을 전개했다. ⑥ 사회주의운동에 참가한 주체들이 해방이후 변혁운동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김천지역 사회주의운동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으로서, 그리고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분야이기에, 김천학의 핵심 내용의 하나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상에서 최송설당 연구, 감문국 연구, 사회주의운동 연구를 사례로 들어 김천학의 주요한 주제로서의 가능성을 이야기해 보았다. 이것들은 향후 심도 있는 논의 과정을 거쳐 김천학의 핵심 주제로 선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