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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공원 - 추석의 언저리에서

김영호(전 대구교육대학교 대구부설초등학교 교장)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5년 10월 01일
ⓒ 김천신문
“영호야 벌초 가자.” “아버지, 오늘은 어디로 가는데요.” “어제 오후에 갔던 큰골로 다시 가자.” 아버지는 벌초 도구인 톱과 낫 그리고 갈퀴는 발채에 놓고 지게를 지고 일어섰다. 벌초에서 가장 핵심 도구인 낫은 조선낫과 왜낫인데 미리 숫돌에 갈아서 날을 세운 것이다. 아버지는 지게작대기를 소리 나게 짚으면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내려간다. 영호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간다. 좁은 골목길 오른쪽에는 집집의 담장과 맞닿은 도랑이 있다. 골목길이 끝나고 마을 안의 도랑보다 넓고 깊은 도랑 옆으로 난 길은 더 좁다. 가을이라 도랑은 바짝 말라 있다. 도랑을 건너서 큰골로 들어가는 산길은 더 좁고 가파르다. 산길 양쪽의 산비탈 밭에는 콩이나 고구마 등이 자라고 있다. 아버지는 가끔 뒤돌아보면서 걸음걸이를 조절한다. 비탈길을 오를 때면 약간은 헐렁한 검정고무신이 쉽게 벗겨지기 쉬워서 잔뜩 용을 쓰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산을 개간해서 자두나무를 심은 권씨네 밭을 지나면 마을 사람들이 큰골못이라고 말하는 커다란 저수지가 나온다.

아버지는 잠시 쉬어가자면서 저수지 둑에 고단한 어깨에서 지게를 내려서 지게의 세장에 지게작대기의 Y자 형태로 생긴 윗부분을 끼워서 세운다. 아버지는 손을 들어 중턱을 가리키면서 어제 오후에 벌초를 한 곳이 저기고, 오늘 벌초할 곳은 그 아래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커다란 반원을 그리듯 맞은편 산을 가리키면서 내일부터 벌초할 곳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저수지 아래는 전부 논이다. 벼 수확전이라 이산저산의 단풍이 들기 전인 오후의 산 그림자가 저수지에 일렁인다. 저수지 아래쪽을 보면 김천에서 구미로 가는 신작로가 있다. 차가 지나갔는지 뽀얀 먼지가 그 너머 경부선의 기차에서 내뿜는 연기와 꼬리잡기 시합을 한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수십 만 번의 지게질을 한 그 어깨에 다시 지게를 진다. 밀삐라고 부르는 지게의 끈을 잡고, 오른발로 목발이라고 부르는 지게 왼쪽의 끝을 살짝 올리면서 왼쪽 어깨에 지게의 왼쪽 밀삐를 얹고, 이내 오른쪽 밀삐를 오른쪽 어깨에 멘다.

저수지 둑 아래쪽으로 난 길을 조금 걸으면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면 흘러내리는 곳이 나온다. 가을이라 흘러넘치는 물은 없는 작은 다리를 건너면 산으로 접어든다. 이곳에는 임씨네가 산기슭을 개간해서 자두나무를 심은 계단식 밭이다. 밭 위에는 산소 몇 기가 있고 요리조리 난 산길을 따라 걷는다. 아버지의 지게작대기는 지팡이 역할을 한다. 조금 숨이 차다 싶으면 증조모 산소가 나온다. 오른쪽 오르막길을 조금 더 오르면 증조부 산소가 나온다. 어제 오후에 증조부 산소 벌초를 했으니 오늘은 증조모 산소 벌초를 할 차례이다. 어린 영호의 눈에는 증조모 산소 터가 경사도 심했고 굉장히 넓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지게를 산소의 가장자리에 내리고 큰 숨을 한 번 내쉰다. 이번에는 지게를 세우지 않고, 지게의 두 가지와 두 목발이 땅에 닿도록 눕힌다. 지게를 지는 사람 못지않게 힘들었을 지게에 대한 배려이다.

아버지는 톱을 들고 산소를 그늘지게 하거나 산소 쪽으로 쓰러진 가장자리의 나무를 정리한다. 그 다음에는 조선낫으로 톱을 사용하기에는 조금 가늘고 왜낫을 사용하기에는 조금 굵은 나뭇가지를 정리한다. 그리고 왜낫으로 봉분부터 풀을 베기 시작한다. 예전의 농부는 일정한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체력에다 낫질, 괭이질, 삽질을 능숙하게 하는 게 덕목이었다. 오른손잡이인 아버지는 낫질도 아주 잘하셨다. 봉분의 풀 정리가 끝나면 위에서부터 아래로 풀을 베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갈퀴로 벤 풀을 한 군데 모아둔다. 며칠 동안 가을볕에 바싹 말라서 가벼워진 풀은 훌륭한 땔감이자 소먹이인 소죽을 끓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버지가 벌초에 여념이 없을 때 영호는 산소의 가장자리나 그리 멀지 않은 산속에서 망개나무의 열매인 빨간 망개를 따서 오물거렸다. 도토리같이 딱딱한 껍질을 가진 깨끔이라고 불렀던 개암이라도 따는 날에는 아버지에게 가져가면 어금니로 깨물어서 반으로 갈라주면 밤맛이 나는 속살을 발라먹곤 했다.

그렇게 증조모 산소의 벌초를 마친 아버지는 담배 한 대를 피우시고 다시 지게를 지고 앞장선다. 영호의 손에는 아버지가 벌초를 하면서 장만한 지팡이 겸 놀이용 막대기가 들려있다. 영호는 손에 쥔 막대기로 발에 걸리는 풀이나 몸에 스치는 나뭇가지를 툭툭 치면서 아버지 뒤를 졸졸 따랐다. 저수지 둑 아랫길을 걸을 때면 큰골의 산 그림자기 저수지를 덮고 저 멀리 감천 쪽에 가을 햇살이 비스듬하게 허리를 구부리고 있다. 산길을 돌아서 마을의 골목길에 접어들 때면 개와 늑대의 시간이 되어 이집 저집의 초가집 위로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날 저녁에 무엇을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 옆에서 잠든 영호는 피곤했던지 다음 날 아침에야 일어났다. 영호가 1970년 언저리에 대신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기억하는 추석 언저리의 벌초 풍경이다.

그 뒤로도 아버지의 벌초를 따라다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소풀을 베느라고 낫질을 시작한 것 같다. 낫질에 익숙해지면서부터는 벌초를 가면 낫질을 하거나 갈퀴질을 하면서 아버지를 도왔다. 벌초를 오가면서 특별히 기억나는 대화는 없다. 하지만 그 벌초를 오가는 길에 말없는 눈빛이나 앞서가던 아버지의 뒷모습과 어깨에 진 지게의 잔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래서 그런지 영호는 지게를 지는 것을 좋아한다. 영호에게 지게질은 육체적인 한계에 도전하는 의미도 있지만,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짊어지고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벌초는 주로 오후에 많이 다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전에는 산소를 가는 길이나 산소에 이슬이 많기도 하고, 오전에 농사일을 하고 오후에 벌초를 한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추석 언저리에는 요란한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예초기의 등장이다. 아직도 벌초를 하는 데 낫질이나 톱질도 필요하다. 하지만 예전에 조선낫과 왜낫이 한 일은 예초기로 거뜬하게 해결할 수 있다. 일찍 예초기를 장만해서 산소의 벌초와 밭의 풀을 베는 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처음 예초기를 사용한 날은 밥을 먹는데 손이 떨려서 수저를 재대로 들지 못한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궁금한 것은 영호가 어렸을 때 집안의 15기가 넘는 산소의 벌초는 모두 아버지 몫이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 아버지 세대가 영호 세대에게 벌초를 물려주고 얼마 동안 집안이 여럿 함께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다시 집안의 벌초는 영호와 동생 몫이 되었다. 사촌 형님이나 동생이 먼저 간 까닭도 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내 부모 산소의 벌초도 나 몰라라 하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아버지와 벌초를 다녔을 때보다 더 많아진 산소의 벌초를 영호와 동생은 둘이서 할 수 있을 때까지 하자고 했다. 마음씨 좋고 부지런한 동생은 형님을 생각한다고 틈틈이 벌초를 해서 둘이서 증조부모 산소 벌초만 하면 되도록 하고 있으니 참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올해도 추석을 한 달여 앞둔 언저리부터 예초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과수원의 풀을 베는 예초기 소리는 겨울을 제외하고 연중 들리는 고향의 소리가 되었다. 음력으로 8월 하순이 되면 이산 저산에서 들리는 특유의 예초기 소리는 추석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웅변한다. 화양연화 농장의 맞은편 포도밭 주인인 우리 아포읍 대신 3리의 이장님은 며칠 전에 새벽같이 벌초를 시작해서 한나절 만에 마쳤다고 한다. 동생하고 증조부모 산소 벌초날을 잡았다. ‘언저리’는 ‘둘레의 가 부분’, ‘어떤 나이나 시간의 전후’, ‘어떤 수준이나 정도의 위아래’라는 뜻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온 추석의 언저리에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그리 많지 않은 환갑의 언저리에서,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가늠하는 언저리를 생각한다.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5년 10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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