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통해 김천에서 최초로 시조 당선된 정완영·배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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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완영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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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를 통해 김천에서 최초로 중앙지에 등단한 문인은 정완영과 배병창이다. 두 사람은 김천시문학구락부가 탄생될 때까지만 해도 자유시를 썼는데 시조로서 등단한 연도가 동일하다. 해방의 감격과 빼앗긴 말을 다시 찾은 기쁨과 함께 이 지방에서도 문단 조직을 모색해 오다가 1947년 8월 김상갑, 임성길, 김도오, 전택근, 여석기, 권오기, 전성근, 최목랑이 주도하여 김천시문학구락부를 조직했다. 배병창과 정완영이 이에 가입하면서 동인지『오동梧桐)』을 창간(1947. 8. 10)했는데 이는 해방 후 김천 문단활동의 새로운 신호탄이었다.
『오동梧桐)』지의 체제를 살펴보면 나재수 화가가 표지화를 그리고 정완영이 서시, 木朗 최근배(崔根培 1910∼1978)가 축사, 권오기가 창간사를 썼다. 목랑은 송병돈, 김수명과 함께 김천 근현대미술계의 선구적 활동을 한 화가다. 김천시문학구락부의 대표는 김상갑, 임성길이 편집을 전담하고 재정까지 부담했다. “오동”이란 제호는 성장 속도가 어마무시 하여 사람의 답답한 마음을 탁 트이게 하고, 봉황이 둥지를 튼다는 벽오동 전설에서 따왔다.
권오기는 창간의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 … 해방된 이 강토에 영광과 광명이 없고 우울과 한숨만이 많다. … 우리는 다 이름 높은 시인들은 아니다. 세련된 어법도 모른다. 오직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써 좋은 시 읽기를 원한다. … 서로 공부하여 오동과 같이 무던하고 구름과 같이 자유롭고 무지개와 같이 황홀한 시들을 쓰려고 한다(권오기,『梧桐』지 창간사에서).
책의 뒷부분에 학생시란을 두어 박기황(김천중 4년), 한시철(배영중 1년), 권정필(김천여중 3년), 임성숙(성의여중 1년), 이정기(김천농중 4년), 안종렬(김천중 3년) 학생의 시와 동요를 곁들였는데 아쉽게도『오동梧桐)』지는 2호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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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완영의 첫 시조집 "채춘보"(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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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완영(호 白水 봉산 예지동 태생 1919~2016)은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해바라기」가,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조국」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조 창작에 몰두하였다. 첫 등단 시조 「해바라기」를 소개해 본다.
보람에 지친 꽃이여 다 못 타는 기다림이여/화경같은 눈동자 감을 길 바이 없어/샛노란 그리움만이 헛되이도 늙누나//우러러 하늘에는 구름이 헤살졌고/파고 드는 설움에 고개가 무거워도/학의 목 쫓는 꿈길은 외줄기 길 무지개//춘삼월 홧홧하던 허물어진 화초들은/차라리 벗어버린 청춘의 의상일레/너 홀로 돌고 돌아서 온 여름을 지켜라//한 줌 흙 영토 위에 피어난 목숨이여/가난한 마음씨엔 외로움도 낙일런가/자잘굿 씨앗을 품고 기도처럼 서럽다//(정완영, 「해바라기」 전문)
장별배행 4수로 구성된 작품인데 첫 시조집『채춘보』(1969)에는 빠져있다가 제2시조집『묵로도』(1972)에 실렸다. 봄 여름 신산을 겪으며, 어렵게 한 목숨을 지키고 서 있는 해바라기의 실상에 화자의 감정이 이입돼 있다. 뒷날 정완영의 대표작이 된「조국」에서의 정서와 어조, 분위기가 유사하다.
이후 정완영 시조시인은 한국 현대시조문학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며 시조문학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음은 잘 알려지는 사실이다. 김천시에서 2008년에 직지문화공원 내에 백수문학관을 건립해 그 문학정신을 현양하고 있다.『정완영시조전집』에 생애에 남긴 시조가 모두 집약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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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병창 시조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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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창(호 秀雲 구성 광명동 태생 1927~1976) 역시 1960년 1월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기旗」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조지훈이 심사위원이었다. 배병창의 출세작「기旗」를 소개해 본다.
가슴에 새겨 간직/꿈 속에 그린 보람/금빛 이 아침에/의젓이 휘날려라/안으로 되우 끓인 피/고스란히 바치려오//아아 꽂을 땅도 없고/흔들 하늘이 없던/차마 그 고비/아슬아슬하였어라/겨레의 소원 이루어/다소곳이 섬기리//이 밝은 아침엘랑 구석구석 날려 보라/저 하늘 주름잡아 펄럭이는 높은 뜻을/오늘도 고개 숙이어/두 손 고이 모으오//(배병창,「기旗」 전문)
‘기(旗)’를 조국애와 통일 염원의 객관적 상관물로 삼아 구별배행 3수로 구성한 시조다. 첫째 수에서 조국이 해방된 보람을, 둘째 수에서 기를 꽂을 땅도 없고, 흔들 하늘도 없는 정황에서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겨 통일 조국을 이루고 싶은 겨례의 숙원을, 셋째 수에서 국혼의 기상과 그에 대한 화자의 충정을 기도하는 자세로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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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창의 제1시조집 "소나기와 종"(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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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창 시조시인은 김천중학교 재직 중 아쉬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현대시조 140여 수를 남겼다. 1979년 김천문화원에서 남산공원에 배병창시비를 세워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시조집『소나기와 종』(1960),『항아리』(1965),『이슬과 송학』(1975)이 있으며, 유족에 의해 발간된『수운배병창선생 유고문집』(2000)이 있다.
1950년대 들며 6·25 전쟁으로 인하여 김천의 문예활동 역시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공백을 ‘김천문화의 집’이 조직되어(1954. 2.) 기관지『소문화』가, “벽과 눈 동인”(1956), “흑맥문학회”(1959) 등이 메워왔다. 1960년대에 들어 “맥동”(1962), “김천문우회”(1965) 1970년대에는 “향목회”(1972), “김천시문학회”(1978), 1980년대 들어 “김천문학회”(1980)가 지역 거주 문인 및 출향 문인들을 모아 문예 전통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1988년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가 발족되면서 오늘에 이르며 김천의 문학은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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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맥문학회 창립연" 개최 포스터(1959. 12. 27.). 사진 제공:박찬선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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