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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천신문 |
조선시대 실학파의 선구적 학자로 존경받는 이수광(1563~1628)의 호는 지봉(芝峯)이다. 그래서 그의 문집을 ‘지봉집(芝峯集)’ 또는 ‘지봉선생집(芝峰先生文集)’이라 한다. 이 문집은 이수광이 죽은 뒤, 아들 이성구(李聖求)와 이민구(李敏求)가 그의 유고를 편집해 1633년(인조 11)에 초간본을 간행하였다. 지봉집은 전체 341권(부록 3권 포함)으로 목판본이다. 이 중에 권21~24는 잡저이다.
이수광은 1578년(선조 11) 초시에 합격하고, 1582년 진사가 되었다. 1585년(선조 18)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589년 성균관 전적을 거쳐, 이듬해 호조 좌랑, 병조 좌랑을 역임하고,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700여 척의 왜선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왜적이 조선을 침공하면서 임진왜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수광은 1592년 4월 경상우도 방어사(慶尙右道防禦使) 조경(趙儆, 1541~1609)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한양을 떠나 경상도에 부임하였다.
이들은 1592년 4월 24일경 거창 신창지역에서 수십 명의 기병으로 일본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지휘하는 왜군 500여명을 만나 분전하고 물러나 추풍역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1592년 4월 28일부터 29일 전투에서 왜적의 대군을 막아낼 수 없어 대패하고 황간 등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황간과 추풍령에서 왜군과 싸웠다. 이때 적의 기세가 대단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따르던 아전과 군졸들 대부분이 도망가고 흩어졌다.
이수광은 이 시기 자신의 처지와 임진왜란 때 김산 지역에서 겪은 전쟁의 상황을 지봉집 권23에 실린 연풍전(年豊傳)이란 글에 서술해 놓았다. 이 글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연풍이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흥미롭게도 연풍은 당시 나이 20세의 김천역(金泉驛) 소속의 노비였다. 이때 연풍은 이수광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 따르며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한편 1592년 4월 29일 새벽 선조 임금은 평양으로 몽진을 출발하였고, 5월 2일 한양은 왜적에게 함락되었다. 이후 이수광은 운봉과 수원을 거쳐 선조가 피난한 의주의 행재소로 갔다. 그리고 9월에 함경북도 선유어사(宣諭御史)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의 선무 활동에 공을 세웠다. 연풍은 이때까지 말고삐를 놓지 않고 이수광을 모시고 다녔다.
사실 이수광과 연풍은 직접적인 주인과 노비로 엮인 관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연풍은 김산, 추풍령, 황간 전투에서. 그리고 운봉, 수원을 거쳐 의주와 함경도까지 이수광을 말에 태우고 다녀왔다. 이러한 연풍의 헌신적 섬김에 감복한 이수광은 그 고마움을 글로 써서 남겼으니, 이것이 연풍전이다.
이 자료는 임진왜란 당시 김천지역에서의 전투와 김천역 소속 노비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기에 번역문과 원문 사진을 소개한다.
지봉선생집(芝峯先生集) 권지이십삼(卷之二十三) 잡저(雜著) 연풍전
연풍은 김천역(金泉驛)의 노비이다. 임진년(1592, 선조 25) 왜적의 변란으로 나는 본디 관직 이조 낭관으로서 방어 종사관(防禦從事官)에 임명되어 영남(嶺南)으로 갔다. 이때 왜적의 기세가 충천하여 아전과 군졸 등 따르던 자들이 대부분 도망가 흩어졌다. 연풍만이 홀로 말고삐를 잡고 나를 따르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들에서 노숙하는데 왜적이 주둔한 곳과 매우 가까웠다. 군부대가 밤에 기습을 당해 사람과 말이 거꾸러지고 무너졌다. 연풍이 급히 나를 부축해 말에 태워 유린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또 김산(金山)의 촌사(村舍)에 있을 때 내가 일어나지 않고 누워 있었는데, 불시에 왜적이 열 걸음도 안 될 정도로 가까이 돌진해 왔다. 연풍이 서둘러 재촉하여 말을 타고서 겨우 뒤 골짜기로 들어가니, 칼을 휘두르며 추격해 오는 왜적이 매우 많이 보였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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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전 원문1(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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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雲峯)에 도착하여 도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동행한 장수와 군사들이 서쪽을 향하여 통곡함에, 연풍도 몹시 슬프게 곡을 하였다. 삼도(三道)의 병사들과 함께 수원(水原) 경계에 진을 치고 있다가 이윽고 북쪽으로 달아나는데 왜적이 거의 등 뒤까지 다가왔으나 연풍이 말을 채찍질한 덕분에 그 수렁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해 가을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했다가, 곧바로 어사(御史)로서 함경북도로 달려갔다. 내가 연풍에게 말하기를 “네가 고생이 심했는데 불모지에까지 또 들어갈 수는 없다. 여기 머물며 내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하자, 연풍이 “저 혼자 뒤에 남을 수는 없습니다.”고 하면서 함께 가겠다고 강하게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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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전 원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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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계사년(1593)에 이르러 경성(京城)에 왜적이 물러감에 연풍이 비로소 하직 인사를 올리고 김산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 보니, 늙은 어머니는 무탈하였고,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해 오래 전부터 상복을 입고 있다가, 서로 보고는 귀신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 이듬해에 연풍이 또 서울로 나를 보러 왔다가 떠나가서는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영남에서 의주까지, 또 옮겨 함경북도까지 몇만 리의 험한 여정에 왜적이 우글거리는 곳을 드나들며 위태로움에 빠진 것이 수 차례였다. 왜적이 접근하기라도 하면 연풍은 하루 종일 망을 보았고, 혹은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며, 늘 말에 안장을 얹어 놓고 기다렸다. 밤에 위험한 곳을 지날 때에는 연풍이 오른손으로는 말고삐를 붙잡고 왼손으로는 내 몸을 부축하고서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하면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었다. 모든 두루 챙기고 보호하는 것이 정성을 다하여 조금도 나태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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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전 원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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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에 있을 때는 그의 집이 몇십 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그 어미와 아내의 생사를 알지 못했는데도 전혀 떠날 의사가 없었다. 달아나 피할 때에 전후좌우가 모두 왜적이어서 조만간 틀림없이 죽게 되리란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시종일관 떠나지 않았고, 왕왕 식량이 떨어져 혹 하루 종일 먹지 못해 매우 기진했는데도 한마디 불평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왜 떠나지 않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연풍은 곧 대답하기를 “나는 떠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차마 떠나지 못하는 점이 있어서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오호! 나는 연풍과 평소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를 부릴 만큼 은혜나 위세가 있는 것도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만나 알게 되었다. 또 연풍은 미천한 노비라서 선비와 군자의 행실이 있음을 아는 자도 아니며, 또 칭찬받으려고 가식적으로 꾸며 벼슬해서 녹을 받으려는 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러하니 참으로 가상하다. 이때에는 노비로서 주인을 버리고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챙기지 않는 자가 넘쳐났다. 벼슬을 맡은 신하까지도 혹은 구차히 목숨을 연명하려고 생쥐처럼 달아나 숨고, 처자식을 연연해하여 임금을 잊고 나라에 등을 돌렸다. 비록 이들이 의관은 번듯하여 두려워할 만하다. 이 사람을 어떻게 보겠는가?
연풍은 이때 나이가 스무 살이었으며, 사람됨이 근실하고 과묵하며 매우 순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