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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공원 - 행복한 인생 ② 역사용

김영호(전 대구교육대학교 대구부설초등학교 교장)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6년 02월 12일
ⓒ 김천신문
“자, 오늘은 어제 강독한 소학의 내용을 배송해 보겠다. 누구부터 하면 좋을까? 먼저 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라.” 방건(方巾)을 쓴 훈장은 왼손으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학동들을 둘러보았다. 훈장 자리에서 오른쪽에는 네 명, 왼쪽에는 다섯 명의 학동이 앉아 있는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훈장은 오른손으로 앞에 놓인 서안(書案)을 톡톡 두드리면서 재촉했다. “자, 어제 배운 소학을 배송(背誦)할 사람은 손을 들어라. (헛기침으로 잠시 뜸을 들이고는) 아무도 없단 말이지. 그러면 누구부터 시킬까?” 학동들 모두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훈장의 자리에서 오른쪽 네 번째 자리에 앉은 영호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음, 그러면 오늘은 오른쪽 제일 끝에 앉은 영호부터 하겠다. 영호야 앞으로 나오너라.” 사색이 된 영호가 책을 들고 훈장 앞에 앉았다. “영호야, 책은 앞에 놓고 돌아앉아서 어제 배운 내용을 외워 보아라.” 영호는 책을 훈장의 서안 앞에 놓고 돌아앉았다. 여덟 명의 학동들은 영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침을 삼키고 있었다. 영호는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 배운 것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으면서 머리가 하얗게 되는 느낌이 들었다. 훈장은 계속 헛기침을 하면서 재촉했다. “영호야, 배송을 시작해라.” 영호는 연신 마른침을 삼키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영호는 시간의 늪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영호야,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았구나. 그렇게나 복습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공부를 하지 않았네. 혼이 나야겠다. 종아리 걷어라.” 영호와 같은 줄에 앉은 세 명의 친구는 안달이 났다. 한 친구는 배송할 쪽을 펼친 책을 슬그머니 영호 앞으로 내밀었다. 또 다른 친구는 작은 소리로 배송할 것을 알려주었다. 훈장은 짐짓 모른 체했다. 영호의 반대쪽에 앉은 친구들은 파안대소하면서 신이 났다. 평소에 영호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터라 영호가 혼나는 것이 무엇보다 고소했다. 영호와 마주 보고 앉은 왼쪽 다섯 번째 자리에 앉은 친구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웃고 있었다. 훈장은 이 또한 모른 체하며 생각에 잠겼다.

영호는 왼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오른손으로 왼쪽 발목의 대님을 풀기 시작했다. 훈장은 등을 보이고 앉은 영호가 훌쩍이면서 대님을 푸는 것을 보면서 고민했다. 첫 시간부터 회초리를 들자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영호는 배송을 하지 못하는 이유도 말하지 않은 터였다. ‘영호, 이 녀석이 왜 이리 쉬운 것을 배송하지 못하지? 친구들하고 노느라고 복습을 못했나? 아니면 집안일을 돕느라고 외우지를 못했나? 혹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이미 한 말이 있어서 거두어들이기에는 엎질러진 물이었다. 훈장은 학동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왼손으로 서안 밑에 있는 회초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뗐다.

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로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등 영조와 정조 시대에 최고의 화가로 이름을 떨친, 우리에게는 씨름, 무등, 벼타작, 대장간 등 서민들의 일상을 정감 있고 익살스럽게 그린 이로 기억되는 단원 김홍도의 ‘서당’ 그림의 이면을 풀어 보았다. 이 그림의 뒷이야기도 궁금하다. 훈장은 영호에게 회초리를 들었을까? 아니면 좋은 말로 타이르고 다짐을 받았을까? 당시의 사회상으로는 회초리를 때리는 것은 사랑의 매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행위이다. 하지만 영호가 훈장이라면 회초리를 들지 않았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이 훈장이라면 어떻게 할지도 궁금하다.

영호는 김홍도의 서당에서 역사용을 보았다. 단지 서당의 한 장면을 익살스럽게 묘사한 것뿐만 아니라 그 내면에는 역지사지, 사랑, 용기가 내포되어 있다. 훈장이 영호에게 회초리를 드는 것을 미루는 것은 영호의 사정을 알기 위함이다. 즉 영호의 입장이 되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이다. 친구들과 노느라고, 집안일을 돕느라고 배송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른 이유는 없을까? 어쩌면 영호는 난독증이나 문해력이 부족한 학동일 수도 있다. 실제의 영호는 대신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김영호’라는 세 글자만 겨우 읽고 쓸 수 있었다. 1학년 내내 한글을 익히느라고 애를 태웠고, 통지표에는 아름다울 ‘미’가 가장 많았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훈장이 영호의 입장이 되어보는 역지사지는 사랑이 바탕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역지사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랑의 시작은 자신부터 아끼는 것이 먼저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지극정성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용기는 시작하거나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작한 일이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중도에 포기하는 마음이나 실천의 영역이다. 훈장이 회초리를 들지 않는 것은 회초리를 드는 것보다 훨씬 용기 있는 선택일 수도 있다. 그래서 김홍도의 서당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지사지와 사랑과 용기의 역사용이 매우 잘 나타난 명화라고 확신한다.
무인도나 깊은 오지에 혼자 살면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현대인은 누구나 두 명 이상이 모여서 살아가는 사회에서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사의 다툼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기보다 나부터 생각하는 아전인수에서 시작한다. 누군가 장난삼아 들진 돌에 개구리는 목숨이 달려 있다고 한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할 수도 있고 다툼이 될 수도 있다.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한다면 역지사지는 시나브로 나의 그림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에 용기를 더하면 금상첨화이겠다. 이왕 사는 세상, 멋지게 살아가는 세상에 역사용이 충만하다면 이게 행복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자 이 네 글자 소리 내어 읽어보세요.” 하면서 A4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6미터 정도 떨어진 학생과 보호자에게 보인다. 학생과 보호자는 멈칫하면서 “역지사지”라고 소리 내어 읽는다. “잘 읽었습니다. 학생은 이 역지사지가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학생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생각에 잠긴다. “역지사지는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는 말입니다. 즉,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는 뜻이지요. 역지사지를 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아닙니다. 1초, 아니 0.1초만 생각해도 됩니다. 친구들과 생활하면서 이 역지사지를 생각하면 두 번 다시 이런 자리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라고 학생과 보호자께 다짐을 받는다.

그리고 역지사지 이야기가 끝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당부도 한다. 이어서 영호는 문장이 쓰인 종이를 들고는 학생이 읽게 한다. “‘용기와 두려움은 한 이불을 덮고 잔다.’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속에 용기와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용기와 두려움을 합하면 100점인데, 언제나 용기 점수를 높게 해서 어떤 일이 생기면 혼자 해결하려고 끙끙대지 말고 바로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세요. 그게 용기입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고는 학생이 일어서고 영호도 일어선다. 마주 보고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를 하면서 회의를 마친다. 어느 지역의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위원장인 영호의 마지막 당부도 역사용이다. 어려서부터 역사용이 충만한 삶은 행복한 인생의 디딤돌이 될 것이다.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6년 0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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