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사에서 19세기 후반은 서구로부터의 새로운 물결이 파도처럼 밀어닥쳐 온 시기다. 1894년 갑오개혁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의 반 세기는 다양한 변화가 요구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근대미술기로 연구되고 있는데 그 양상을 요약하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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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고보 미술교사 시절의 송병돈(1937). 김천고보 제7회 앨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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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시대의 연장, 새로운 미술제도와 개념 도입, 사진·시각 혁신, 서양화의 2차 파급, 삽화·인쇄미술·건축이 개화한 개화기를 지나 서양화가와 동양화가 1세대가 배출되고 전람회미술과 단체전·개인전이 태동한 1910년대,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고 동양화가 개량, 서양화단의 형성과 약진, 조각가·건축가·공예가 출현, 서화협회와 소집단 미술운동 발생, 미술비평과 미술론이 대두된 1920년대, 서양화단의 팽창과 동양화 증식, 조각·공예·건축계가 형성되고, 한국미술의 이론적 모색이 증식된 1930년대를 거쳐서 시국미술이 대두되며 좌·우 대립, 민족미술 건설과 민족미술론이 성행하면서 해방 공간에서 미술 창작이 되던 시기까지를 가리킨다.
김천의 근대미술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고미술 유물을 살펴본다. 흔히 김천에는 이렇다 할 고미술이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선 신라시대 것으로 남면 오봉리의 갈항사지 동·서삼충석탑(758년, 경덕왕 17), 청암사 수도암 동·서삼층석탑(859, 헌안왕 3), 청암사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과 개령면 동부리의 마애지장보살 석불좌상의 건축미를 꼽을 수 있다. 갈항사지 동·서삼층석탑의 건축미와 그 가치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와 진술을 필요로 한다. 현재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는데 곧 환수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 전기의 것으로 감문 광덕리의 석조보살입상과 청암사 수도암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조선 전기의 것으로는 김산향교(1392), 후기의 것으로 구성 방초정(1625), 남산동 개운사의 아미타 불상(1637년 추정)·지장보살상(1685년 추정)과 김산동의 봉황대(1700년대),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1744, 영조 20) 등이 있다. 이밖에도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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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돈 교사가 지도한 김천고보 서화부 활동 모습(1937). 제7회 김천고보 앨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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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의 근대미술 유물로는 최송설당 만년의 거처였던 부곡동 정걸재(1919)를 들 수 있다. 6·25 때 불타고 잔재와 관리동인 취백헌이 남아있는데 복원할 움직임이 있다. 이 시기에 김천과 관련이 있는 서예활동을 한 근대 서예가 김돈희(金敦熙 호 惺堂 1871~1936)의 서예미가 김천에 남아 있다. 그는 1918년에,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고희동과 함께 최초의 근대미술단체인 서화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제4대회장을 역임하면서 당시 한국 미술계의 중심 역할을 했다. 김은호·노수현, 뒷날 걸출한 서예가가 되는 손재형과 화가 장우성 등이 모두 그에게서 배웠다.
성당은 송설당문집 원본을 친필로 써서 소장되게 하고 정걸재, 취백헌, 묘비명, 김천고등학교명 글씨를 썼으며 송설당동상 건립에 일조하기도 하였다. 청암사 일주문의 현액 글씨와 동아일보 창간 제호도 그의 필적이다. 일제가 강제로 한일병탄조약을 체결할 때 ‘한일병탄조약문’을 쓴 것은 생애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1925년, 지금의 김천시립미술관이 있는 남산동에서 김천 최초의 단체미술전이 열렸다. 김천 최초의 근대미술전이다. 1925년 11월 22~23일 김천소년회가 주최하고 금릉여성회와 금릉청년회, 시대일보·조선일보·동아일보 김천지국이 후원하여 금릉청년회관(현 김천초교 정문 옆에 있던 사립초등교육기관)에서 “남조선소년소녀 현상양화전람회”를 개최했다. 이 무렵 김천의 학교들에 재직하면서 송병돈, 최목랑, 김수명 등은 김천 근대미술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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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돈이 김천고보 재직시 그린 풍경화 「추청」 : 동아일보(1937. 9. 23.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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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최초의 근대미술인 송병돈(宋秉敦)한국의 회화는 통상 전통적 양식인 동양화(또는 한국화)와 외래적인 양식인 서양화(또는 양화)로 구별하여 전개해 왔다. 이러한 양상이 19세기 후반에 중원으로부터의 문화 유입, 서구로부터의 새로운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고유한 양식이 쇠락하게 되었다. 외래 문화의 충격에 밀려 사생에 의한 리얼리즘 정신이 퇴조되고 관념적인 양식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천의 근대미술 풍토 역시 척박했다. 1933년 4월 송병돈(宋秉敦 호 석천. 충남 연기 태생)이 김천고보 미술교사로 부임하면서 교내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김천 근대미술사에서 송병돈은 꼭 기억할 필요가 있는 미술교육자요 화가다. 그는 이미 공주의 영명학교 학생 신분인 1924년에 제3회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부문에서「초하의 금강」으로 입선, 동경 유학 시절인 1926년 제5회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부문에서「조춘」과「춘일의 H양」2점으로 입선한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송병돈은 1930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면서 고희동, 김후수, 김복진, 오지호 등과 동문이 되었다. 뒷날 김복진은 송병돈의 추천으로 최송설당 여사의 동상을 제작하게 된다. 이들 동문 중 1934년에 구본웅, 길진섭, 김용준, 이종우 등이 주축, 송병돈도 가세하여 <목일회>를 결성했다.
1930년대에 들어 한국 화단은 전 시대에 이어 일본화풍과 향토색 사이의 문제뿐 아니라 겉핥기식 향토색과 겉핥기식 서구화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이에 대해 송병돈은 '향토색이나 일본화풍, 서구풍 등을 구분하여 특별히 민족적 정체성을 구현할 것을 주장하기보다는 순수회화예술에서는 작가 개개인의 심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역할을 먼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중립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관점이 이후 송병돈의 궤적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전한다(조은정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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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미술학부 재직 때의 송병돈 교수(1953, 부산 송도 시절) 사진 임응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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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돈은 김천고보에 재직할 때 동아일보에 김천을 소재로 한 기행문「남방토南方土」를 자신의 삽화를 곁들여 연재했다(1935년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총 4회). 김천의 지리, 교통, 주거환경 특히 남산루 부근 주민생활상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 기행문에는 영남지방의 풍토, 기후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연재 2회분 삽화는 남산루를 올려다 본 시점에서 그 너머의 주택가와 지붕, 골목길의 사람들을 묘사한 것이다. 이 삽화에 대해 김용준은 정현웅(백석 시인의 친구)와 송병돈을 거명하면서, 지지부진하던 조선의 삽화계가 작금 양년 간에 장족의 진보를 보이고 있다고 칭찬한 바 있다(동아일보 1935. 12. 28.).
1939년 3월 25일 송병돈은 김천고보를 사임하고 4월 1일 평북 영변의 숭덕여학교에 부임했다. 김소월의 시「진달래꽃」에 나오는 그 영변, 송병돈은 이곳을 무척 좋아하여 압록강변의 벽동으로 학생들과 근로봉사를 가기도 했다.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영변은 청천강의 지류인 구룡강이 흐르는 곳, 봄이면 언덕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벽촌으로 기차도 닿지 않는 촌이라 했다. 송병돈은 거기서 노후를 보내려고 희천 근처에 땅을 사 놓기도 했는데 해방을 즈음하여 모두 빼앗기고 남하했다.
1947년 2월 송병돈은 서울 양정중학교에 부임, 재직했다. 이때 우리가 잘 아는 수필가 김진섭의 유명한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선문사, 1949. 3.)에 장정을 김영주 화가와 함께 하기도 했다. 송병돈은 1949년 9월 1일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부에 부임했다. 길진섭, 김용준, 김환기는 이미 초빙돼 와 있는 터였다. 도쿄미술학교의 다른 동문들보다 뒤늦은 부임이었지만 동경미술학교에서 함께 수학하고 훗날 서울대 미술대 초대학장을 지낸 장발과의 인연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송병돈이 서울대 미술부에 취임할 당시 동양화에 장우성, 노수현, 서양화에 장발, 유영국, 김환기, 조소에 윤승욱, 김종영 등이 재직하고 있었다. 모두 미술교육 현장에서 왜색 탈피와 민족미술 건설이란 절실한 당면 과제를 해결해 나아간 한국 근대 미술교육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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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돈이 김영주와 장정한, 김진섭의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의 표지(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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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돈의 이력에 특기할 사실이 하나 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학생 데모, 4·25 교수 데모 때 송병돈은 다른 젊은 교수도 참여하지 않은 데모에 나선 것이다. 1961년에 장우성, 노수현, 장발 등이 정년 제한으로 사퇴하자 전쟁 전부터 재직한 회화과 교수로는 송병돈이 유일하게 남게 되었다. 1962년 4월 25일 서울대 미술대 동창회 주최로 회갑연을 맞이하고 그해 60세 정년제를 포함한 임시 특례법에 따라 8월 31일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 후 송병돈은 창작미술협회전에 가입하여(1963) 참여하며「작품」(1964)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물꼬를 튼 중요작이란 평을 받는다. 중학교 미술교과서(1966년 검정)을 전상범·박대순과 공저하면서 중등 미술교육에도 관심을 보였다. 1967년 여름 서울에서 갑작스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자 유족이 서울대학교 미술대에 유작과 장서를 모두 기증했다. 1984년 10월~12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송병돈·박상욱·박수근 특별전>을 연 바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