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화단에서 대구의 근대미술은 한국 근대미술의 축소판 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 전개 시기가 비슷하고 중앙 화단에서 활동한 화가들과 유사한 명성을 지닌 화가들이 대구에 다수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대구를 우리나라 근·현대화의 태동지이자 전국을 이끌었다고도 말한다.
곧 1920년대 초 대구의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이 서양 화구를 들여오고, 첫 도화교사로(계성학교, 신명학교)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서양화전을 열어(1921) 전통회화의 기류를 근대미술로 돌림. <벽동사>(1923), <영과회>(1927), <향토회>(1930) 등의 미술 연구 및 전문인 단체가 생겨나면서 근대미술의 풍토를 개척함. 서병오 서화가와 박명조(1926,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서동진(1927, 첫 개인전. 선전 수 차례 입선), 우리가 잘 아는 이인성(1929, 제8회 선전 입선, 연속 6회 특선), 권진호(1934, 선전 제13회 입선) 같은 화가들이 근대미술의 근간을 다져온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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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국민학교 교감 시절(1951-1954)의 김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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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김천의 근대미술 풍토를 다져놓고 대구로 간 화가 중 목랑 최근배 외에 또 한 사람을 더 들 수 있다. 누구일까. 김수명(金壽命 아명 鶴峰 호 素峰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556번지 태생)이다. 소봉은 대구사범학교를 박정희보다 2년 뒤에 졸업(1939)했는데, 문학적 소양도 겸비하여 가끔 시를 쓰면서 재학 중에 벌써 제17회 선전에 입선(1938)해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서동진, 인인성, 권진호는 물론 대구사범 선배인 영양 출신의 금경련으로부터 자극을 받고 영향을 많이 입은 것으로 알린다.
김수명은 1939년 3월 김천 남산동의 심상소학교(현 김천초등학교) 교사 및 김천고등여학교 강사로 교직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해 5월 벌써 김천에서「오후의 거리」, 「산사 가는 길」, 「정물」, 「정원」, 「성하」, 「초여름」 등의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조사된다. 자연히 김천 남산동 내지는 지역의 풍경 또는 정물 그림이 다수 나타났는데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가 있는「오후의 거리」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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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소봉 김수명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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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면밀히 관찰해 본다. 우측 아래에 “1939. 5. 壽命”이란 사인이 들어 있다. 김천국민학교로 갓 부임해 온 그가 해거름의 어느 거리와 뒷산을 그린 종이 수채화, 아마 김천 남산동에서 고성산 발치의 노실고개로 닿는 어느 거리의 풍경인 것 같다. 얼핏 보면 서투른 작품 같으나 작품이 나타내고자 한 시대적 배경과 정황를 더 깊이 추적해 보자. 투명함을 강조하는 수채화에서의 관례를 벗어나 과감하게 무채식과 어두운 색을 사용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말, 군국시대의 암울과 개인의 심적 고독을 투사한 것으로 해석 된다.
김수명이 첫 취업으로 인한 개인적 긴장과 설렘이 없지 않았을 터인데, 점점 전쟁 상황으로 치닫는 시대적 통제와 긴장이 교차 되어 나타나 있다. 화면을 세로로 양분하듯 비딱하게 기운 전봇대와 그 아래 길게 뻗은 그림자가, 안정을 거부한 채 시대의 억압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기울어지게 만드냐 하는 암시로 보인다. 골목 끝을 향해 걸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은 날로 심해 가는 일제의 군국정책을 향한 순응일까, 체념일까. 화가가 일제 군국주의 말기의 시대적 상황에 처한 개인의 의식적 동요를 예민하게 포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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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명, '오후의 거리'(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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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정물, 인물 위주의 소박한 자연주의
소봉은 1940년에 김천에서「남산동 풍경」,「유희」등을 발표하고 제19회 조선미전에「교회가 있는 풍경」으로 입선했다.「교회가 있는 풍경」은 배경이 지금의 남산교회 또는 황금동교회인 것 같다. 그해 10월 그는 김천상무관(예의 김천경찰서 체육관) 전시실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는 김천 최초의 근대 개인미술전이었다. 이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중에「校舍가 있는 풍경」은 주목을 요하는 종이 수채화가 아닌가 한다. 자신의 근무교가 있는 김천 남산동에서 저 멀리, 강사로 나가고 있는 김천여자중학교 교사가 있는 풍경을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당시 남산동, 모암동의 풍경과 김천여중고 건물을 알아 볼 수 있게 하는 그림이다.
더 면밀히 작품을 살펴본다. 화면 왼편 위에서 오른편 아래로 흐르는 남산동 언덕의 대각선이 멀리 모암동 들판과 신음동 산이 이루는 수평선과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사실적으로 공간과 대상을 묘사하는 서양 풍경화와 달리 암시적, 상징적으로 그려낸 전통서화 기법의 동양화. 당시의 시내 가옥, 건물 배치를 알아볼 수 있게 한다. 이를 두고 김영동 미술평론가는 ‘수묵화에 대한 교양과 감수성이 배어나 우리 정서에 너무나 친근하게 와닿는 그림’이라 했다.
소봉은 8·15 해방이 되자 김천 대신국민학교를 거쳐(1945. 10~1946. 8.), 김천여자중학교 교사로(1946. 8.~1948. 8.) 재직했다. 1948년 9월, 경북대 사범대 문학부 국문과에 진학해 다녔는데 6·25 전쟁으로 인하여 1952년 5월에 수료했다. 이 와중에 김천국민학교 교감으로(1951. 10.~1954. 6.), 김천여중 교사로(1954. 6.~1957. 10.) 또 재직했다. 8·15 해방과 6·25 전쟁을 겪고 난 후 소봉의 화풍은 관념적인 주제의 구상화, 추상적 조형 의지를 드러내려 한 것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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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에서 김수명이 그린 '교사가 있는 풍경'(1940);유족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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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가을 박인채, 배상현, 송준상, 홍성문, 김수현 등은 문화의 집에서 김천화우회를 창립하고 10월에 귀거래다방에서 창립전을 개최했다. 김천 최초의 현대 단체 미술전이었다. 11월에 김천 ‘문화의 집’(현 김천문화원)이 창설되면서 여기에 김천초등학교 교감으로 있던 김수명이 미술반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현대 미술을 대중화하였다. 이때에 소봉이 하복 교복을 입은 여학생을 그린 수채화 2점이 발견되는데, 김천여자중학교에 재직할 때 그린 것으로 판단 된다. 그「여학생」(1955) 1점을 소개한다.
김천과 대구 근·현대미술 간에 다리를 잇다1955년 10월 11일~17일 문화의 집 운영위원회는 시 의사당에서 김천화우전을 개최했는데 사진전에는 정건양, 미술전에는 김수명, 시화전에는 박재호를 주무자로 선임해 추진했다. 김수명, 박인채, 홍성문, 김태은, 배상현, 문종두가 출품하고 심사 및 감상회에는 설기현, 박인채, 배상현, 김태은, 박재호, 김수명, 강중구가 참여했다(『김천문화원 50년사』, 김천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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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명이 김천여중 재직 때 그린 '여학생'(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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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9월 김수명은 김천문화관 운영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약하면서 김천문화관(현 김천중앙초교 정문 왼편) 전시실에서 제2회 개인전을 열었다. 김천화우회에는 관여하지 않다가 10월에 회장이 되면서 네 번째 단체전에는 출품을 했다(『김천시사 (하)』, 김천시, 1999). 연말에 문화의 집 제1회 밤 행사를 했는데 이에는 최근배와 함께 참여했다.
김수명은 1957년 10월 대구상고로 전입해 간 후 대구사범학교, 경북여고 등에 재직하다가 1962년 9월 대구교대 미술과 교수로 취임했다. 생애 후기에는 회고적, 종교적 내용을 다룬 작품을 많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총 조선미술전에 4회, 국전에 4회 입선했다.
소봉은 김천 근·현대미술의 풍토를 개척하고 대구의 근대미술도 현대로 이어간 화가 중의 일인이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정점식 화가는 소봉의 작품세계를 “저 어려운 시대적인 상황을 체내에서 연소시키고 겉으로는 무사 무난하게 보이는 낙천주의”라 했다(‘김수명 서거 60주년기념전’ 서문). 그동안 소봉의 그림을 가지고 크게는 김천에서 (1980, 김천문화원 전시실), 대구에서 <제6회 개인전>(1980, 대구매일화랑), <소봉 김수명 화백 유작전>(1993, 대구문화에술회관), <작고 작가 발굴, 김수명전>(2011, 대구문화에술회관), <손일봉·김수명 작가 회고전>(2012, 대구문화예술회관), 서울에서 광복80주년기념 <향수, 고향을 그리다>(2025. 국립현미술관 덕수궁) 등의 개인, 단체, 초대전을 연 바 있다.
김수명은 1957년 10월, 박인채는 1959년에 대구로 떠났다. 김천의 현대미술은 홍성문, 배상현, 송준상, 김수현, 김태은, 박희문, 윤사섭 등이 주도하는 김천화우회를 중추로 활동해 오다가 김천미술협회(1974. 조직)가 그 바톤을 이어받는다.
(연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