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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공원 - 아버지의 언덕

이태윤(시인·수필가)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6년 04월 23일
ⓒ 김천신문
40년 공직 생활을 마친 날, 보국훈장 삼일장의 큰 훈장을 받았다. 많은 지인의 박수와 축하의 순간에도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그 기쁨을 제일 먼저 전하고 싶었던 분, 나를 가장 먼저 축하해 주었을 분은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의 가장 오래된 그림자이다.

아버지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었다. 하지만 국한문을 혼용한 글씨는 내가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단정하고 힘이 있었다. 시골 동네 사람들은 편지 보낼 일이 있으면 아버지를 찾았고 아버지는 묵묵히 그들의 사정을 한 자 한 자에 담아 정성껏 써 내려가셨다.

아버지는 여름날이면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고, 동네 머슴을 포함한 학교 못간 청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셨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세상살이에 꼭 필요한 한글을 배우는 데 있어 그보다 더 지혜로운 스승은 없었다. 모깃불 연기 속에서 젊은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일제강점기 학교를 다니셨던 아버지는, 4학년에서 5학년을 월반하여 6학년으로 올라갔다고 말씀하셨다. 일본인 교장은 아버지의 재능을 알아보고 중학교에 보내라 할아버지를 찾아와 권유했다. 하지만, 가난은 그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아버지는 개근상이 우등상보다 소중하다고 말씀하셨다. 끝까지, 빠짐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 가르침은 내 삶의 등불이 되었다.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어려운 가정 형편임에도 빚을 내 등록금을 마련해 주셨다. 문중 제사를 지내며 제주(祭主)가 읽는 제문의 오낭독(誤朗讀)을 작은 헛기침으로 알려주신 것처럼, 아버지는 매사에 섬세함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했다. 남들 앞에서 늘 조용히 나와 주변 사람들을 이끌어 주시고 격려하셨다.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는 산과 같았다. 종친회 족보를 개정할 때도, 갓 태어난 증손자의 이름까지 꼼꼼하게 챙겨 올리고, 가장 먼저 참여하셨다. 누구보다 철저하게, 그러면서도 당연한 듯, 조용히 가족의 삶을 책임지고 전통을 지켜야 하는 무게를 묵묵히 짊어지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의 손을 잡아드려야 할 때, 나는 곁에 없었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끝내 손 한번 제대로 잡아드리지 못했던 한이 남아있다. 오늘도 나는 불효자의 이름으로 이 글을 쓴다. 그 손을 한 번만 더 잡을 수 있다면 … .

사람들은 친구 부모님, 지인들의 문상을 다니며 듣던‘죽음은 자연의 이치’라고 말한다. 나 또한 남의 일일 때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가 떠나신 뒤, 그 이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용히 내 등을 다독이던 손길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매일 밤 그 빈자리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불가마 속에서 아버지가 한 줌의 재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날, 나는 문득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덧없고도,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손끝으로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사라지는 그 형체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삶의 무게를 안겨주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랑이란, 결국 이별을 품고서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가 하는 증거는, 얼마나 깊이 이별에 아파하는 가로 남는다는 것을.

아버지는 저승이라는 먼 길을 홀로 여행을 떠나셨다. 나는 여전히 이승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분이 향하신 곳은 어쩌면 이 세상보다 더 따뜻하고 고요한 세계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나는 알 수 없는, 그러나 언젠가는 모두가 향할 그 어딘가로 … 남은 재를 가만히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그 속에 깃든 존엄을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이별을 지나야 완성된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내 삶은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다. 내 안에 있는 허세와 불안, 그 모든 것을 덮어주던 아버지의 침묵과 삶의 무게, 내 인생의 절반은 아버지의 언덕을 디딘 덕분이었다. 그 언덕 위에서 나는 자랐고, 걸으며, 버텼다.

코로나의 병실에서 아버지의 손을 잡았을 때, 아버지는 말했다. “아무 일 없지 … 나 걱정하지 말고, 너그들이나 잘 살아!”라고 하던, 짧고도 단단한 그 한마디가 내게 남은 마지막 가르침이 되었다. 마지막이 된 그 목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남아 나를 붙든다.

오늘 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고 그립다. 이 훈장을 여전히 많은 사람 앞에서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단 하나, 그 칭찬과 축하를 아버지한테서 듣고 싶기 때문이다. 내 삶의 기둥과 모든 성취는 결국, 아버지라는 언덕 위에 세워진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 언덕을 오른다. 기억과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6년 0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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