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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수필 - 무흘구곡과 청암사 <하>

민경탁(수필가)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6년 06월 18일
무흘구곡과 청암사

ⓒ 김천신문
하늘 가린 연봉들이 내주는 숲길로 다시 승용차를 몰아간다. 승용차가 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무흘구곡의 종착지에 이르니 물소리 요란하다. 물줄기의 탄성에 발길이 멈칫거려지는 곳에 한강 선생의 시비가 서 있다.

아홉 굽이 머리 돌려 다시금 한숨 쉬나니 九曲回頭更喟然
내 마음은 산천만 좋아함이 아니로다 我心非爲好山川
근원은 말하기 어려운 묘함을 절로 가졌나니 源頭自有難言妙
이를 버려두고 어찌 별천지를 물을 것인가 捨此何須問別天

출렁다리를 건너 숲속 아래 나무 계단을 따라가니 목소리 큰 폭포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제9곡 용추폭포다. 성리학의 거두는 이 곳에서 우주의 근원을 캐며 도학의 이상을 실현코자 했나 보다. ‘태백산 아래서는 퇴계가 나고, 지리산 아래선 남명이 살고, 가야산 아래선 한강이 태어났다’는 말이 생겨났을 법하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수도암이 있다는데 날이 저문다. 용추폭포 곁으로 ‘인현왕후둘레길’이 조성돼 있다. 인현왕후가 은거할 때 거닐던 길, 지자체에서 역사 테마 둘레길로 복원해 놨다.

조금 전 올라왔던 삼거리로 되내려온다. 도로 안내판을 따라 청암사를 찾아가니 왼편으로 펼쳐지는 산맥과 그윽한 계곡을 따라 또 다른 선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리번거리며 올라가니 숲길 오른편 작은 바위에 ‘靑巖寺 八景’이란 글씨가 보인다. 제목 옆에 보니 ‘시루봉 위에 뜬 달 甑峰明月, 쌍계사 앞 맑은 시내 雙溪玉流, 무흘정사 일대의 맑은 바람 武屹淸風, 영대에서 티끌을 씻음 靈坮洗塵, 추령의 저녁노을 秋嶺落照, 용추 폭포龍潭瀑布, 수도암의 한가로운 종소리 修道閒鍾, 선대로 돌아가는 구름 仙臺歸雲’이라 새겨 놨다. 영대는 청암사 입구의 세진암, 추령은 청암사 오른편의 가릇재, 선대는 수도산 정상을 뜻한다고 한다.

청암사 일주문에 이른다. 입구에 ‘佛靈山靑巖寺’란 현판 글씨가 숨 쉬며 꿈틀대는 듯하다. 불령산은 수도산의 별칭. 일제강점기의 대표 서예가로 동아일보 창간 재호를 쓴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의 글씨다. 천왕문을 지나 돌길을 조금 걸어 오르면 암벽 사이에 줄다리가 펼쳐 기다리고 있다. 줄다리를 밟아들면 계곡의 바위들이 온통 푸른 이끼로 단장하고서 내방객을 맞이한다. 암벽에 인명과 ‘세진암(洗塵巖)’ ‘호계(虎溪)’ ‘여산(廬山)’ 등등 이곳을 다녀간 많은 이들이 필적을 남겨놨다. 이 계곡의 형상이, 호랑이가 준령을 나는 듯하다 하여 ‘호계(虎溪)’, 세상의 티끌을 씻어 내는 바위라 하여 ‘세진암(洗塵巖)’이라 쓴 글씨는 서예의 대가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 선조 28~1682 숙종 8)의 필적으로 알린다. 미수는 퇴계와 남명과 한강의 문하 그리고 장현광에게서도 수학한 것으로 전한다. 임제의 외손, 이원익의 손서였다. 이끼 계곡의 작은 폭포수에서 나오는 서늘한 정기가 온몸에 엄습한다. 절의 이름이 왜 청암사인지 알겠다.

세진암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니 극락전, 보광전을 가리키는 팻말이 서 있다. 팻말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가니 장송 숲속에 호젓한 오솔길이 열린다. 오솔길 돌계단이 다 하니 텃밭, 텃밭이 다한 끝에 극락전이 눈앞에 와 닿는다. 극락전은 정적에 잠겨 고즈넉하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7칸 목조 한옥인데 난간마루에 약간의 궁중 건축미가 더해져 있다. 극락전을 중건할 때에 인현왕후의 기거를 기억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 김천신문
극락전을 돌아가니 청기와 골 지붕 머리를 한 작은 전각 하나가 나온다. 보광전이다. 장희빈의 모함으로 서인이 된 인현왕후가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기도한 법당으로 전한다. 전국의 수많은 사찰을 두고 왜 이곳으로 왔을까. 인현왕후의 어머니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따님, 외할머니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따님. 우복 집안과 청암사와의 배려에 의해 이곳으로 숨어든 것으로 전다. 왕후 아닌 왕후는 이곳에서 3년가량 숨어 살며 복위를 빌었다고 하니.

보광전 왼편에 함원전(含願殿)이란 전각이 있다. 함원전 안에는 인현왕후가 환위된 뒤 이 절로 보낸 감사의 편지가 액자에 담겨 전시돼 있다. 편지 머리에 ‘인현왕후어제등록(仁顯王后御製謄錄)’이라 했다. 읽어보니 이 절 스님들의 충정과 기력을 다한 기도로써 복위됨에 대한 감사의 뜻이 담겨 있다. 왕후는 그 고마움에 비녀와 잔과 신을 보내며 새로 지은 축각의 현판을 ‘함원전’으로 해 달라는 부탁을 곁들인 것이다. 왕후가 복위돼 떠난 후에도 많은 궁녀들이 이곳을 지날 때면 종종 찾아 들어 희사를 했단다.

보광전 수각 앞으로 ‘인현왕후 경행길’이 자그마하게 조성돼 있다. 이 산책로를 걸으며 정쟁에 시달린 심신을 달래었을 왕후의 사정을 상상해 본다. 조선 숙종 대는 당파 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서인과 남인이 서로 몰아내고 몰리고, 복수하고 복수 당하는 정쟁의 연속. 결국 국력과 사회개혁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을 터. 보광전 앞 수각에서 물 한 바가지를 떠 마신다.

본당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큰 계곡 푸른 이끼 가득한 바위가 사찰의 역사를 일러주는 듯하다. 피안교를 건너니 본당이 그윽이 내방객을 맞는다. 수 천 년 고요를 깨트리기라도 하듯 저녁 종소리 은은히 산등성이를 넘는다.

무흘구곡은 성리학의 근원을 알게 하는 수련장이요 절경 피서지, 청암사는 세사의 먼지를 씻는 도량이요 역사 테마 관광지이니 일거양득의 수양장이라 하겠다. 자못 찾아올 만하도다. 아 만나고 깨닫고 사는 인생, 행복하여라.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6년 0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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