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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불러주는 내 이름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0년 11월 19일
누군가 불러주는 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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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박영희(수필가, 김천 출생, 대원보건진료소장)

'당신’이라고 했다. 만난 후 두 주일 만에 그가 내 앞에서 선언하듯 한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당신을 향해 걸어가겠노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이 말의 어감은 강렬했다. 고립된 산골 지역이며 성탄절 전야라는 이유,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저녁이라는 배경, 그가 던진 말의 내용, 이 모든 무게만큼이나 사회 초년병인 나를 들뜨게 했다. 그때까지 내 의식에 각인된 ‘당신’이란 호칭은 어른이 된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에서 상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순간 이제 진짜의 인생을 꾸려가야 할 어른이 되었다는 자각인지 착각인지를 했던 것 같다. 성숙한 인격체로 대우받는 느낌에 설레었다.

결혼 후 남편은 ‘아내’라며 나를 소개했다. 시골에서 그 이름의 영향력은 컸다. 시골 마을 어르신들이 드디어 나를 책임감 있는 직업인으로 인정해 준다고 느꼈다. 오가며 실없는 농담으로 자리를 차지하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비로소 ‘울타리’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십 대 중반부터 시골 지역에서 혼자 일해야 하는 특별한 근무환경을 가진 나에게 울타리는 매우 필요한 조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내’라는 이름은 세상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몹시도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일이어서 여러 고단함을 감수해야 했다. 결혼 후 ‘애인 같은 아내’라는 화장품 광고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 화장품을 바르면 반짝이는 애인 같은 모습을 유지할 것이라 믿었는지 한동안 그 화장품에 애착이 갔다. 덩달아 아내의 무거움도 벗어버리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엄마’라는 호칭은 인생에서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다. 그 이름을 감당하기엔 부족한 것이 많았으나 최고의 값진 경험이었다. 지금도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저 흐뭇하다. 자연의 순리에 의해 아기가 어른이 되었지만 내가 아이의 키를 늘리고 몸을 다 불린 듯 자신이 대견하다. 내리사랑의 본능이 내 피에도 흐르고 있음을 경험하는 일은 감격스럽다. 불완전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가장 견고한 이름 하나를 얻었다. 가장 뚜렷이 흔적으로 남는 결과물이다.

‘아줌마’라고 불렸다. 보건진료소를 방문하는 환자 중 나를 매번 습관처럼 ‘아줌마’라고 부르는 아저씨가 있다. 둘이 있을 때보다 누군가가 그 호칭을 듣게 될 때 민망함을 느꼈다. 그가 밉기까지 했다. 내가 그를 ‘아저씨’라고 호칭하듯 내가 ‘아줌마’가 아닌 건 아닌데 말이다.
대학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시간강사에 불과했지만 ‘교수님’이라고 불러주는 호칭이 감미로웠다. 학교에서 전화가 올 때마다 평소와 다른 톤의 목소리가 되어갔다. 기품과 교양을 갖춘 목소리를 내기 위해 타고난 허스키한 목소리를 다듬었다. 길에서 학생을 만나면 자세가 달라졌다. 직장 일로 대학 강의는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아쉬움이 컸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호칭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 경험은 내가 세상의 직위에 흔들린다는 방증이다. 내 그릇이 그만큼이라는 씁쓸한 증거다.

호칭은 사회적인 지위를 대변할 때가 많다. 지위에 대한 갈망은 호칭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그 시절이 잠시였다 해도 그 후의 나머지 인생 모두를 통틀어 우리는 그렇게 그를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예의인 사회이고 그래야 관계 속에서 마음이 놓인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불안을 느끼는 큰 이유가 자신이 갈망하는 지위에 오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회가 호칭 인플레에 시달리는 것도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고자 하는 방편이나 위로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를 무슨 호칭으로 부르든 다른 이의 호칭이 무엇이든 그것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깊은 호수의 마음이 되고 싶다. 외형에 치우쳐 진실을 놓치고 싶지 않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고요하고 단단한 내면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길은 멀고 그래서 부끄럽다.

회귀본능일까.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호칭 전부였던 시절처럼 언제부턴가 내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는 사람이 제일 좋다.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0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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