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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편집국 기자 / 입력 : 2006년 01월 27일

 


 


노경애(위량초등학교)


 빈 항아리가 대문 앞 가로등 불빛아래 서러운 듯 웅크리고 있다. 요즘 보기 드물게 큰 항아리인데 누가 이사를 가면서 버린 모양이다. 아까운 마음에 누가 볼세라 낑낑거리며 집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본가 뒤란에는 유난히 큰 장독대가 있었다. 사열을 받는 것처럼 한 치 오차도 없이 가로세로 간격을 맞추고 햇볕을 쪼이고 있었다. 항아리도 서열이 있다. 맨 뒷줄에 놓여있는 큰항아리는 그 집 음식 맛을 좌우하는 간장항아리인데 큰 덩치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어머니는 빛 좋은날만 되면 간장 항아리를 여닫는 것이 아예 습관이 되었다. 햇볕을 자주 쪼인 오래 묵은 간장이 감칠맛이 있다고 하셨다. 주둥이가 좁은 배가 볼록한 항아리는 된장이 담겨있고 그보다 작은 항아리는 고추장 순으로 올망졸망 놓여있었다.


 어머님은 작은 밭뙈기에다 콩 농사만큼은 손수 지으셨다. 장독대에 과꽃이 필 무렵이면 일일이 알 좋은 놈을 골라 무쇠 솥에 넣고 허물해지도록 삶았다.석 달 열흘 띄워서 음력 정월 장을 담아야 짜지 않고 맛이 있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언제나 옥양목 앞치마를 두르고 뒤란 장독대의 항아리를 윤기가 나도록 반들반들 닦았다. 특히 된장을 떠내고 나서 꼭꼭 다독여 봉해놓지 않으면 가시가 생긴다고 누차 말씀을 하셨다. 다독여 놓은 된장이 들쭉날쭉 흔적이 있으면 무섭도록 나무라신다. “에미야, 된장항아리 속은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거나 마찬가지니라 정성을 드려서 관리를 해야지 잠시 소홀하면 집에 도둑이 들 듯, 파리란 놈이 알을 슬어 된장을 망쳐 놓는다.


 어머니에게 항아리들은 당신의 남편이요, 자식이었다. 궁핍한 시절, 삶이 힘들어 속상할 때는 항아리를 닦으며 푸념을 늘어놓으셨을 것이고,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쳐야하는 책임감이 두 어깨를 짓누를 때마다 항아리를 닦으며 고단을 풀었을 것이다. 항아리 속의 된장콩알이 허물어져 맛있게 숙성되기까지는 어머님의 고단한 삶이 그러했으리라.


 주어온 항아리를 깨끗이 씻고 볕에 말렸더니 윤기가 돌았다. 우둘투둘 거칠고 조금은 비뚤게 생겼는데도 볼수록 정감이 간다. 하마터면 산산조각이 나서 쓰레기와 함께 흉물스럽게 버려졌을 항아리였다. 그 옛날 소박맞은 아낙이 갈 곳이 없어서 서낭당에서 앉아있는 형상이 이러했으리다.


 나는 빈 항아리에다 무엇을 채울까 생각한다. 앞마당에 떨어진 감을 주어다가 감식초를 만들어볼까, 항아리에다 넣어두면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는데 쌀을 부어놓을까, 그도 아니면 철지난 옷을 넣어둘까, 거실 한 켠에 둥근 유리를 깔고 차 한 잔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볼까.


 아니, 이젠 내 손으로 장을 담아야겠다. 어머니의 손맛처럼 처음부터 맛있게 장을 담을 수 없겠지만, 내 마음속 항아리에 꼭꼭 채워서 늘 일깨워주시던 삶의 지혜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면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마음은 저 만치 봄을 달린다.


 

편집국 기자 / 입력 : 2006년 0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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