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기리 신기, 은석 동좌2리 동리마을로부터 좌측으로 들어가 철길을 넘어서니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교각이 앞을 가로막는다. 국도 확장공사로 동리 앞으로 지나던 노선이 신기마을 앞으로 옮겨지면서 과거 장관을 이루던 신기마을 앞 느티나무숲 정난걸이 왠지 초라해 보인다. 은기리는 난함산을 배후로 은기천을 따라 차례로 늘어선 신기(新基), 은석(銀石), 봉항(鳳項) 세 부락을 일컫는데 조선시대까지는 김산군 구소요면(求所要面)에 속했고 1914년 신기, 은석, 중리(中里), 봉항 4개 마을을 합하여 은석의 은(銀)자와 신기의 기(基)자를 따서 은기동(銀基洞)으로 하였는데 뒤에 중리는 봉항마을로 합해졌다.
가장 앞쪽에 있는 신기마을은 행정동명으로는 은기1리인데 지금의 마을 자리는 본디 자리가 아니라 은석마을과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인촌으로 불리는 김해김씨 재실 옆에 마을이 있었는데 과거 도적이 자주 출몰하여 주민들을 괴롭힘에 현 마을 자리로 이주하고 새터라 했고 나중에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신기(新基)라 했다고 마을 이장 박희성(72세)씨가 전한다. 이 마을은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성산전씨 일가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래 1618년 김해김씨 두산(斗山)이라는 분이 나주에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살기 시작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 마을과 동리 사이에는 와룡지라는 저수지가 있는데 와룡지(臥龍池)와 지네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jpg) △지네형의 풍수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는 와룡지
은석마을 노인회장 강용만(74세)씨에 따르면 와룡지로부터 신기, 은석마을까지의 형세가 풍수적으로 볼 때 지네형인데 옛날 저수지 자리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어느 날 시주를 원하는 한 고승을 박대하였고 화가 난 스님이 지팡이를 끌며 부자집으로 이어지는 혈맥을 끊었고 결국 그 부자는 망해 그 집터는 저수지가 되었다는 것. 그런데 특이한 것은 저수지로 물을 공급하는 수로가 다름 아닌 스님이 지팡이를 끌며 올라간 흔적이라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신기마을위에는 은석(銀石)마을이 있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의령남씨가 처음 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1702년에 상주 외남 내곡동에서 인동장씨 성웅(成雄)이란 분이 이주해 인동장씨 집성을 이루어 왔다.
은석은 마을일대의 암반 색상이 대부분 은색을 띠고 있어 은색 바위란 뜻으로 은석(垠石)이라 했다고 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변음이 되어 지금은 인수골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은석마을의 갓골저수지 앞에는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7호인 마애반가보살상이 큰 바위 전면에 양각되어 있는데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윤곽이 희미해지기는 했으나 인자하게 굽어보는 보살상의 표정만은 수백년의 세월도 어찌할 수 없는 듯 경이롭기만 하다. .jpg) △도 유형문화재 제247호인 마애반가보살상
마애불상 앞에는 은동폭포가 있는데 수십미터에 달하는 하나의 암반으로 이루어진 유명한 폭포로 이 마을의 명물이었는데 지난1992년 갓골 저수지 축조공사 때 도로를 확장하면서 절반 가까이나 훼손되어 예전의 진면목을 확인할 길이 없다. 갓골 저수지로부터 큰골방면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인근 군부대의 사격장 못 미쳐 해발 백미터 남짓한 독립된 야산이 하니 솟아있는데 인근 주민들은 이 봉우리를 가리켜 태봉양지(胎封陽地)로 부르고 있었다.
은석마을 이장 장재하(61세)씨에 따르면 산 정상에 무덤이 하나 있다고 했는데 통상 태봉(胎封)이란 지명은 왕실의 왕자나 공주의 어태(御胎)를 봉안한 후 태봉으로 명명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조선2대 정종대왕의 태실지인 직지사 대웅전 뒤의 태봉과 효종대왕의 두 공주의 태가 안치된 지례 궁을산 태봉과 함께 우리지역제3의 태봉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jpg) △은석 마을의 태봉양지
<글 /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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