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면은 서쪽으로 충북 영동군과 도계(道界)를 이루며 서남쪽으로는 구성면, 동북으로는 봉산면, 동으로는 대곡동과 접하고 있는데 서남쪽으로는 황악산, 덕대산등 험준한 산악지대가 많으며 북동쪽으로 농경지가 집중되어 있으며 근년에 포도 주산지로 각광받고 있다.
현재의 대항면은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대항면과 황간군 황남면으로 나뉘어 속했었는데 1906년 황간군 황남면의 6개동을 비롯한 봉산면과 미곡면의 일부를 편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항면(代項面)의 원래 지명은 대항(垈項)으로 대항은 지금의 운수1동의 지명인 “터목”의 한문식 표기이다.
즉, 터대(垈)자에 목항(項)자를 썼는데 옛날부터 터목마을이 대항12방(대항면 일대 12개의 대단위 부락)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보니 이 마을의 지명이 자연스럽게 행정단위인 면(面)의 지명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항(垈項)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대항(代項)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골의 입구 즉, “터목”이라고 하는 자연부락의 입지여건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라 할 것이다.
대항면은 천년고찰 직지사와 무수한 산내암자, 그리고 조선 2대 정종대왕의 태실이 봉안된 태봉이 소재한 김천문화의 보고(寶庫)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항면의 자연부락과 전설, 직지사에 얽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대항면의 옛 중심지 터목마을과 개구리봉
운수리는 터목(본리), 돌모, 박수점등 크게 3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터목은 운수1리로 속하는데 상가지구를 벗어나자마자 좌측의 첫 마을로 이 마을이 터목(垈項)으로 불려진 이유는 바람재로 이어지는 긴 골짜기의 길목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붙혀진 것이며 일대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본리(本里)로도 불린다.
실제로 조선시대로부터 일제시대인 1920년까지 대항면사무소가 이 마을에 있었으며 경찰서주재소도 1932년까지 이 마을에 자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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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1리 터목마을 전경·
바람재로 이어지는 큰 골짜기의 초입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약 2백여년 전인 1770년경에 인근 직지사를 찾아 드나들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통상 도로를 기준으로 좌측을 음지마, 우측을 양지마로 일컫는다.
또 직지사 매표소에서 우측으로 돌아 무궁화공원을 지나 수백미터를 더 오르면 역시 운수1리로 속하는 북암마을이 나온다.
북암마을 앞에는 개구리봉으로 불리는 야산이 도로변에 있는데 고(故) 장택상(張澤相) 전 국무
총리의 선영(先塋)으로 예로부터 이름난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개구리봉 옆에는 조선2대 정종대왕의 태(胎)를 봉안한 태봉(胎峰)이 있는데 이 태봉 또한 천하의 명당으로 풍수지리로 볼때 사두혈(蛇頭穴), 즉 뱀이 노려보는 형세라는 것.
때문에 사두혈인 태봉의 기세에 개구리봉의 발복(發福)이 위해를 받을 것을 염려한 인동장씨 집안에서 묘수를 세운 것이 바로 북암 저수지의 축조로 이어졌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 먹으려할 때 개구리가 피신을 하려면 물이 있어야 하므로 개구리봉 옆에 인공으로 저수지를 팠다고 하는데 당시 장택상씨 집안의 재력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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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대왕의 태봉(왼쪽)과 개구리봉(오른쪽).개구리봉 우측으로 북암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