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客)이 노인 뱃사공에게 물었다. “당신은 배에서 사는데, 어부로 보자니 낚시가 없고, 장사꾼으로 보자니 물건이 없고, 뱃사공으로 보자니 강물을 왔다 갔다 해야 되는데 도무지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일엽편주(一葉片舟) 하나를 물에 띄워 여기에 몸을 의지하여 사는 이유가 무엇이오?”
뱃사공은 말없이 그냥 웃는다. 객이 다시 묻는다.
“그렇게 위험하게 살다가 풍랑을 만나면 죽음이 경각(頃刻)간에 닥치게 되고 정신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헤맬 텐데, 이를 즐겨 세상을 멀리하고 뭍으로 올라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주옹(舟翁)이 입을 열었다. “아, 그대는 생각해 보지 않았소? 사람의 마음이란 잡고 놓음이 무상하여, 평탄한 육지를 밟으면 태연하여 방자하게 되고 험한 지경에 처하면 전율하여 두려워하오. 전율하여 두려워하면 가히 조심하여 굳게 지키려니와, 태연하여 방자하면 반드시 방탕하여 위험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내 차라리 험한 곳에 처하여 항상 조심할지언정 안일한 곳에서 살아 헤매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오. 게다가 내 배는 항상 물 위에 떠 있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반드시 기울어져 전복되기 때문에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더 무겁지도 않고 더 가볍지도 않게 내가 그 한 가운데를 지키어 균형을 잡아 평형을 이룬다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거센 풍랑이 출렁거려도 배를 전복시킬 수 없을 터이니 그 풍랑이 어찌 내 마음의 평정을 흔들 수 있겠소. 내가 배에 살면서 뭍에 사는 세상 사람을 보니, 그 편한 것을 믿고 환난을 생각지 않을 뿐 아니라 교만에 빠져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가 많더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은 이런 것을 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나를 염려하는 것이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권근의 작품‘주옹설’에 나오는 글이다. 짤막한 한 편의 글이지만 이 속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지혜와 교훈적 진리가 돋보이는 글이다.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비유적ㆍ상징적 암시를 주고도 남는다. 산다는 것은 물 위에 떠 있는 배 위에서의 생활과 같으니 항상 마음을 다잡아 조심하여 긴장을 늦추지 말고 자기의 중심을 흐트러지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알라신 외는 어느 한 사람도 무서워 할 줄 몰랐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주인공, 세기의 풍운아 후세인이 며칠 전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인생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권세를 누리고, 편안하게 살기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때로는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도 저지르면서 삶을 영위하기도 한다.
스스로 위험한 곳에서 불편하게 사는 지혜, 비록 주옹설이 아닌 우리 주위 자연에서도 교훈을 받는다.
나무들은 비가 많고 햇볕이 따가운 여름에 잘 자란다. 영하의 추위와 폭풍에 시달리는 나무일수록 더 무성하게 잘 자란다.
따스한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약간의 추위만 만나도 얼어 죽는다. 그러나 아무도 돌보지 않는 비탈진 곳에서 자란 야생화는 독한 비바람이 불어도 거뜬히 이겨내고 잘 자라 고운 빛깔을 드러내고 향기를 묻어낸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것을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좁고 꼬불꼬불한 고갯길에서보다 넓고 확 트인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더 많이 나는 것을 본다. 그래도 대부분분의 사람들은 좁은 시골길보다는 편하고 쉽게 가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택한다.
인생사, 거의 대부분이 될 수 있는 대로 쉽고 편하게, 권세와 부를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혹시 뒤에 다가올 환난은 까맣게 모르면서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사는 사람일수록 본인은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끼지를 못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좌절하고 더러는 생을 포기하는 경우를 본다.
하지만 후지고 열악한 곳에서 절망과 좌절을 이겨내고 오히려 꿋꿋하게 자기의 중심을 잡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면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 또한 많다. 그들의 얼굴을 솜솜 살펴보면 환한 웃음 뒤에 행복이 배어 있음을 발견하는데 이들이 바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