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
일당 김태신 스님의 자전소설 ‘화승, 어머니를 그리다’가 발간됐음이 뒤늦게 알려졌다. 도서출판 이른아침을 통해 2권의 책으로 발간된 ‘화승, 어머니를 그리다’엔 직지사 중암에 안좌(安坐)해 그림을 그리는 일당 스님의 눈물의 사모곡이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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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당 김태신 스님 자전소설 '화승, 어머니를 그리다' |
“이화여전을 나오고 도쿄에 유학한 한국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나혜석, 윤심덕과 함께 한국 근대 개화기를 주름잡던 신여성, ‘신여자’라는 여성운동 잡지를 창간하고 ‘폐허’ 동인으로 활동하며 문명을 떨쳤고 육당 최남선보다 먼저 신체시(新體詩)를 발표해 한국 신체시의 효시를 이룬 여류 시인, 후에 불문(佛門)에 귀의해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영년(永年)의 존경을 받고 있는 김일엽 스님 그분이 바로 내 어머니이다.”
일당 스님이 책 앞에서 밝힌 그의 어머니 김일엽 스님에 대한 소개이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최고 관리로 있다가 해방 후 주 독일 일본 대사관 특사를 지낸 오타 세이조를 아버지로, 일본 국책은행 총재였고 거물 재력가였던 오타 호사코를 할아버지로 태어났지만 일본 명문가의 자존을 고수하던 할아버지의 “조선인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절에 자진해서 결별하고 도쿄를 떠나 마침내 입산을 결행, 스님이 된 어머니 일엽 스님을 그리며 쓴 피맺힌 사모곡인 것이다.
님께서 부르심이/천 년 전인가 만 년 전인가/님의 소리 느낄 땐/금세 님을 뵈옵는 듯/법열에 뛰놀건만/돌아보면 거기일 뿐//천궁에서 시 쓸 땐가/지상에서 꽃 딸 땐가/부르시는 님의 소리/듣기는 들었건만/어디인지 분명치 못하여/맴돌기만 하여라//님이여, 어린 혼이/님의 말씀 양식 삼아/슬픔을 모르옵고/가노라고 가건마는/지축 지축 아기걸음/언제나 님 뵈리까
먼먼 외지에 떠돌다가도 후조처럼 돌아와 황악산에 들 때면 떠올리게 된다는 일엽 스님이 쓴 시 ‘행로난(行路難)’ 전문이다.
일당 스님은 수덕사에서 수행하던 그의 어머니 일엽 스님이 공부하기 위해 직지사에 머물 때 찾아와“어머니,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인사를 하자 “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왔느냐!”며 “안녕이고 뭐고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고 한다. 일당 스님이 직지사 중암에 안좌하게 된 것은 이때 일엽 스님이 일당 스님을 떼어놓기 위해 직지사 주지 스님(김봉률)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인연이 됐다.
일당 스님은 직지사에 대해 이렇게 썼다.
“황악산 직지사는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어떤 갈증의 길목이었다. 어머니는 부처님의 정에 목말라했고 나는 어머니의 정에 목말라했다. 원초적 향수인 모정의 갈증을 먼 곳까지 찾아와서도 채우지 못해서였을까 나는 늘 쫓겨난 외로움에 흠뻑 젖어서 그때부터 점점 더 먼 곳으로 한 마리 새가 되어 모국 산하를 떠돌아다녔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좀 더 먼 곳으로 대양을 건너 떠돌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승, 어머니를 그리다’를 쓴 일당 스님은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를 거쳐 일본 고요산불교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이당 김은호 화백과 일본 이토 신스이 화백에게 사사했으며 일본 닛푸전상, 우에노모라미술관상, 신일본미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속가의 연을 끊으려는 냉정한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끝내 라훌라가 되어버린 일당 스님은 한국을 비롯해서 일본, 중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300여회에 걸쳐 미술전람회를 연 화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