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118)
부항면편
▷파천2리 (대밭마. 까리밭골. 숲실)
대야리, 갈불마을과 구남천을 사이로 두고 하천을 따라 길게 연이어 마을이 전개되어있는데 곧 대밭마,까리밭골,숲실이 파천2리로 속한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으로 속한 마을이었는데 1895년 상서면으로 분면이 되었고 1914년 부항면이 신설되면서 봄내마을과 합해 파천리로 되었다가 1963년 세 마을이 파천2리로 분동했다.
이들 마을은 임진왜란때 지금의 웃갈불로 불리는 들판에 화순최씨 한 선비가 피난을 왔다가 후에 임곡으로 정착해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새로 길이 나면서 진입로가 달라졌으나 원래 대밭마,웃갈불,청룡재,부엉바위골,큰평전을 거쳐 까리밭골에 이르고 중고개와 고지미,우무골을 거쳐 숲실로 이어지는 옛길이 있었다고 전한다.
갈불 맞은편에 구남천을 사이로 마주하고있는 대밭마는 한자로 죽전(竹田)으로 적는데 마을뒷산에 대나무가 많아 붙여진 지명으로 지금도 야산을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대야동과 나뉘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다 중고개아래에 자리잡은 까리밭골은 예부터 마을에 꽈리로 불리는 풀이 많아 꽈리밭골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 까리밭골로 되었다.
또 달리 한자로 부용(富龍)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예전 마을의 진입로였던 청룡재가 풍수지리로 볼때 큰 부자를 내는 명당으로 알려져 부유할 부(富)자에 용룡(龍)자를 써서 부용(富龍)이라했다고도 한다.
청룡산아래 최근 웅장한 한옥이 들어서고 있는데 예사롭지 않다.
까리밭골위로는 충북 영동군 상촌면 흥덕리와 고지미재(성재)를 경계로 자리잡은 숲실마을이 나타난다.
인근의 대야동과 함께 일제시대까지 금(金)의 주산지로 명성을 날린 마을로 입구에 버티고 선 거대한 전나무의 위용이 이방인을 압도한다.
△동목앞에서 마을의 유래를 설명을 하고있는 마을이장 박영태(63세)씨
예부터 마을주변으로 밀목령과 얼음밭골, 절골, 남박골등 무성한 산림이 우거져 숲실로 불렸는데 한자로는 수풀림(林)자를 써서 임곡(林谷)이라 했다.
▷안간리(안간,대평)
봄내마을에서 온천개발지를 지나 영동,구성방면으로 가다가 가마골고개를 넘으면 안간과 대평으로 이루어진 안간리가 자리잡고있다.
이들마을도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으로 속해있다가 1914년 부항면으로 편입되면서 안간리로 통합되었는데 가마골고개,애기고개,열두머리고개등 험준한 준령에 에워싸인 오지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관을 알 수 없는 황씨들이 처음 들어와 살기시작했다고 전해지는데 우리지역에서는 드문 성씨에 속하는 대흥이씨(大興李氏)일가가 집성을 이루고 있는점이 특이하다.
안간이라는 지명은 처음 마을이 들어설때 곱독골 골짜기 개울옆에 집을 지었다하여 편안할 안(安)자에 개울간(磵)자를 써서 안간(安磵)이라 했다고 마을이장 김점동(62세)씨가 전한다.
도로위쪽에 깊숙이 자리한 대평동은 마을뒤로 넓은 밭이 있다고 하여 대평(大坪)이라 불렸다고 알려진다.
새로 난 길을 중심으로 아래쪽에 위치한 안간은 풍수지리로 볼때 마을의 북쪽이 트이면 마을에 액운이 닥친다하여 예부터 북쪽에 흙을 쌓고 나무를 심어 마을을 가렸다고 하는데 수년전 봄내에서 구성방면으로 새로 도로가 나면서 쌓았던 흙제방과 나무가 모두 잘려나가고 지금은 정자나무 한그루만이 외롭게 남아있을 따름이다.
△마을을 지키기위해 북쪽에 심었다고 전하는 정자나무
또 마을앞 구도로 방면의 손골 골짜기의 바위가 마을에서 바로 보이면 마을이 해롭다는 속설에 따라 주민들이 바위앞 땅을 공동으로 매입하고 나무를 심어 바위를 가렸다고 하는데 마을을 지키기위한 주민들의 갸륵한 마음씨가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