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가 만난 어린왕자
박경미(수필가·SM교육)
지난 주일이었던가? 여느 날처럼 미사 드리러 갔다가 성당 제대 앞에 피어있는 해바라기를 보았다. 성당 안에서 자라는 해바라기가 있을 리는 없으니 누군가의 정성으로 장식된 꽃꽂이였다. 해만 보며 고개를 돌린다는 해바라기를 실내용 꽃꽂이로 보게 된 건 내게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곳에서 다시 보게 된 해바라기는 온몸에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채 옹색한 모습으로 간신히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있을 자리에 있지 못한 아픔을 자신의 시들한 모습을 통해 알려주려 했음일까?
살아오면서 우린 참으로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정작 꼭 필요한 곳에는 있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인가 보다. 젊은 혈기만으로 가득했던 학창 시절, 적어도 나 자신만을 위해서만 살진 않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던 그 당시, 뜻을 같이 하는 친구랑 봉사란 이름으로 한 달에 한 번 대학 부설기관으로 운영되던 맹아학교를 방문 했던 적이 있었다. 마음만 앞섰지 특별한 봉사 방법도 알지 못한 내게 맡겨진 일은 시각장애로 인해 마음껏 읽지 못하는 좋은 책 내용 들려주기 정도였다. (그 당시만 해도 점자책이 지금처럼 흔치 않았다)
‘부활’, ‘폭풍의 언덕’, ‘노인과 바다’, ‘키다리 아저씨’, ‘레미제라블’ 등 갈 때마다 내가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다시 봐가며 좀 더 재미있게 들려주려 애쓰던 시간들, 그 곳에서 난 나의 어린왕자를 만났다. 많은 아이들 중에 유난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아이, 그 많은 책들 중에 유난히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좋아하던 아이,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그 어린 왕자보다 더 깊은 가르침을 내게 준 아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물질 만능주의에 흠뻑 젖어있는 내게, 허영심으로 잔뜩 부풀어 인간성마저 상실해 가고 있는 내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게 훨씬 많아서 자신은 괜찮다고 말해 주던 아이. 2년이 넘는 시간을 그 학교를 드나들며 그 아이를 만나며 난 내가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취업준비라는 매정한 현실을 맞으며 난 그 아이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은 채 내 현실 속으로 돌아 와 버렸다. 결국 난 나를 위해 그 곳을 찾았고 나를 위해 그곳을 떠나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그 아이를, 그 학교를 떠나고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한 번도 그 아이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늘 내게 현실은 감당하기 힘들만큼 버거운 것이었고 그 현실을 이겨나가는 것만이 내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 목표를 위해 때론 적당한 눈속임을, 때론 적당한 욕심을 부리며 있지 말아야 할 곳에서 조금씩 내 자리를 넓혀왔다.
그러다가 며칠 전 초등학교 아이들 논술 수업을 하다 ‘어린왕자’를 만났다.
“어른들은 숫자만 좋아한다. 내가 친구를 데려오면 그 아이는 무슨 색을 좋아하지? 라든가 어떤 생각을 하지? 따윈 절대 묻지 않고 그 아이 집은 몇 평이지? 그 아이 수학 점수는 몇 점이니? 등만 묻는다” 고 말하는 현대판 어린왕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20년 전 내게 많은 것을 물어보곤 정답은 정작 자신이 말해주던 나의 어린왕자를 기억해냈다.
어느새 난 내가 만났던 어린왕자만큼이나 커 버린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그 아이들을 보면서 과연 지금 난 내가 있을 자리에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행복은 어마어마한 가치나 위대한 성취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꼭 있어야 할 그 자리를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 보임이 중요한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무관심과 이기주의로 단단히 무장하고 살아가는 내게 ‘마음으로 보라’고 알려주던 나의 어린왕자,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 어린왕자를 오늘쯤은 깨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