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살아남기 위하여?
배창환 (시인 · 김천여고 교사)
출근길에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산을 넘어가는데 길이 바로 앞 몇 미터에서 끊어진 듯 안 보인다. 이어져 있던 길 앞에 천 길 절벽이 놓여있는 듯 아찔해서, 지나가는 차들이 전조등을 켜고 브레이크를 거의 밟다시피 하면서, 굽이진 길에선 서로 먼저 크락션을 빵빵 울리며 조심조심 오고 간다. 안개 속에서 사물과 사람이 꿈속을 들락거리는 듯 아득해 보인다. 어제 아침 산기슭에 무리지어 고개 들던 노란 들국화 무리도, 눈높이에서 두둥실 달처럼 떠오르던 달맞이꽃도, 이 아침엔 그저 희미한 배경으로 물러나 있을 뿐,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섭섭하다. 어제와 달라진 것 없는 오늘이고 안개만이 자욱하게 끼어있을 뿐인데, 오늘 아침은 영 가을아침다운 맛이 없고 축축이 젖어드는 음울한 느낌뿐이다. 운전대 앞 창유리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서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이럴 때 길은 이미 길이 아니다. 사람의 길이 아니고 자연의 길이 아닌, 그냥 도달점을 향해 이동하기 위해 지나쳐가는 과정으로서만 남아 있다. 그러다보니 어제의 그 호젓하고 청명한 가을은 이미 나의 시야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삶이 이런 긴장의 연속이라면 정말 살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 오니 아이들이 벌써 여럿 와 있다. 어젯밤 늦은 시각까지 책과 씨름한 흔적이 졸리는 듯한 눈꺼풀에 역력하다. 아침부터 책상에 엎드린 아이도 있고 입에 칫솔을 넣어 세면장으로 향하는 아이도 있다. 이 아이들은 지금 전쟁 중이다.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정상적인 삶을 포기한 채 정서적 신체적 성장이 어렵게 된다면 이는 평생을 두고 아픔이 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장애로 남게 된다. 묘목이 어릴 때 균형 잡힌 체형과 발육에 필요한 영양을 얻지 못하고 햇빛을 충분히 쐬지 못하면 커서 기형이 되고 튼실한 나무가 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너무 여유가 없고 무엇엔가 홀린 듯, 남들이 가는 길을 그냥 따라가는 모습이 오늘날 대부분의 아이들의 자화상이다. 심지어 ‘자면서 10대를 보낸다’ 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싱싱한 활력과 기쁨과 미래를 향한 도약의 꿈을 잊은 채 시간을 보내고, 내 속에 어떤 싹이 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어른이 되어버리는 것이 우리 아이들의 아픈 현실이다. 오늘날 아이들의 삶은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하다. 간혹 쉬는 시간 복도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이 모여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케익에 불을 켜고 빙 둘러서서 축하 노래도 불러주고 시간을 쪼개어 고른 생일 선물도 전달하면서 우정을 다지곤 한다. 그나마도 이런 깜짝 생일파티가 아이들의 숨구멍이 된다는 사실이 슬프다. 지나고 보면 아픔도 추억이 되는 것이지만, 아이들의 이런 모습은 어디까지나 오늘을 넘기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라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무엇을 추억할 수 있으며, 지금 이 시간을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인가. 청소년기는 그냥 오늘처럼 안개 낀 날 차를 몰고 길을 스쳐 지나가듯 훌쩍 넘겨도 좋을 과도기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살아남기 위하여 무한 경쟁이 횡행하는 곳에 비인간화가 따르게 마련이다. 경쟁이 극심한 사회는 결코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오늘날 너도나도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서 사회의 모든 부문에 경쟁을 유발시키려 하지만, 경쟁만이 능사가 아니며 경쟁이 적은 사회일수록 인간다운 사회에 가깝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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