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게도 연습할 시간이 필요한데
박경미(수필가·부곡동)
며칠 전 큰딸아이가 초청장을 내밀었다. ‘목련제(김천여고 축제)’ 때 열리는 시화전에 참석 해 달라고…. 요즘 아이들에게 조금은 고루해 보일지 모르는 문학동아리를 맡고 있는 딸아이가 시화전을 앞두고 분주해 하고 있던 모습을 봐왔던 지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막상 아이가 초청장을 내밀며 정식으로 초대해 준 일에 묘한 감동이 일었다.
밤 열시가 다 되어서야 일을 마친 남편과 나는 서둘러 학교로 향했고 우리가 도착한 전시장은 하루 종일 이어진 축제의 들뜬 분위기가 정점에 달해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선 여고생들의 웃음소리는 축제를 위해 준비했던 화려한 의상들과 어울려 한층 더 고조되어 있었고 여학교 축제에 참가한 간간히 보이는 남학생들의 살짝 상기된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답다.
무슨 일로 그리 바쁜지 정작 초대한 엄마 아빠에게 눈인사만 건네는 딸아이를 뒤로하고 시화에 눈을 돌린 순간 난 어느새 27·8년 전의 나로 돌아가 있었다. 시가 뭔지도 모른 채 그저 난해한 내용 잔뜩 담아 놓고선 설명해 주느라 끙끙 대던 그 시절의 갈래머리로 단정하게 묶었던, 만질 것도 없던 머리 쉴 새 없이 매만지며 짓궂은 질문 해오던 남학생들을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앨범 속에 한두 장 남아있던 그 모습 그대로 내가 거기에 서 있었다.
여고시절의 순수했던 내 모습에 빠져 얼마의 시간을 보낸 걸까? 책상 정리하는 소리 들리고 가만히 지켜보던 남편의 손이 나를 이끈다. 가야할 시간이라고.
‘엄마아빠 죄송해요. 오늘은 너무 바빠서 제대로 대접도 못해 드렸네요. 주말에 집에서 봐요.’ 문자 메세지에 남겨진 아이의 인사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이 참 따뜻했다. 문학동아리 활동으로, 문화 체험 활동으로 주말마다 분주하던 딸아이의 모습이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과 대비되어 내심 불안했었는데 남편 말대로 꽤 괜찮은 고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새삼 흐뭇해진다.
최근 20~30년 사이에 세상은 참으로 빠른 속도로 변해왔다지만 우리들의 정서는 크게 변함이 없는 것 같다. 20~30년 전에 내가 활동하던 문학동아리가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시화전이라는 활동을 통해 그 당시에 내가 느꼈던 그 감정들을 아이도 똑같이 느낄 것이라 생각해보면….
얼마 전 수능이 끝났다. 지난해와 또 달라진 평가제도 앞에서 아이들은 갈팡질팡 어쩔 줄 몰라 한다. 공부하느라 취미생활 한번 제대로 못한 아이들, 언제나 우리에게 비쳐진 아이들의 모습은 교실에 엎드려서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모습과 밤늦게까지 이리저리 분주히 학원 다니는 모습뿐인데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아이들이 겪게 될 절망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에게 아이들은 공부 못하는 아이와 잘하는 아이 두 부류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늘 만난 다양한 개성을 가진 아이를 보며 우리 어른들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읽었던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우리에게 ‘대지’라는 작품으로 잘 알려진,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펄S. 벅이 쓴 작품. 펄S.벅은 한국의 고아들을 포함, 국적이 다른 아홉 명의 고아들을 입양했지만 그녀의 친자는 중증의 정신지체와 자폐증이 겹친 딸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의 기대와 실망, 끝없는 고통 그러나 결국 그 딸에게서 배운 점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분명 나 보다 못한 사람을 얕보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야 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을 우리 기성세대들이 먼저 깨닫고 아이들을 바라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얼마 전 곧 고3이 되는 딸아이가 이젠 정말 시간이 부족하다며 기숙사에 들어갔다. 작은 아이도 타지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게 되어 내년 3월이면 집을 떠나게 된다. 이렇게 떠나게 되면 대학과 직장생활, 결혼까지 이어져 어쩌면 우리와 가까이 있게 될 시간은 거의 없을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럽다. 내게도 연습할 시간이 필요한데. 품고 있던 자식들을 떼놓는 연습도 해야 하고 쓸쓸해진 남편 등 긁어주는 연습도 필요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