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론 일본인 관련 두개의 비 이근구 김천향토사연구회장
“김천의 경제권을 장악한 일본인이 행정권 마저 손아귀에 넣고 안하무인으로 횡행하면서 한국인을 멸시하던 그들이 한국인을 찬양하는 비라면 있는 것도 없앨 판국인데 3·1운동 와중에 얼마나 다급했으면 한국인을 찬양하는 비를 세웠을까?” - 돌보는 이 없는 비
3ㆍ1절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비(碑)가 있다. 황금동 한신아파트 앞 철도 굴다리 입구에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석자 남짓한 화강석 비가 그것이다. 전면에 ‘이위원건수기념비(李委員建壽紀念碑)’라 새겨져 있고 주인공의 공공사업 공적 ‘김천공공 자력취방 정시귀단 찬학유장 진력위생 부심청방(金泉公共 自力就方 整市歸坦 贊學有章 盡力衛生 腐心淸方)’을 열거했으며 장수를 기원 ‘면가불망 수원산장(面篤不忘 水遠山長)’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세운 연대가 예사롭지 않다. 비 좌측에 ‘대정8년 5월(大正8年 五月)’에 김천의 일본 한국 유지들이 세웠다는 것인데 ‘김천일선유지립(金泉日鮮有志立)’ 대정 8년이라면 기미년(己未年 1919년) 3ㆍ1독립 운동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었던 때다.
김천에서는 거시적 시위운동 계획이 사전(3월 11일)에 발각되어 성사되지는 못했으나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집단시위가 일어나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기마대까지 동원하여 총을 쏘아대며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으며 김천에 거주라는 2천여명의 일본인은 시위에 겁을 먹고 문밖에 출입도 못하고 숨죽여 지내고 있었다.
비의 주인공을 이름 없이 ‘이위원건수기념비(李委員建壽紀念碑)’라 했는데 당시 ‘위원회’라면 1917년 김산군 김천면(金山郡 金泉面)이 김천특별면(金泉特別面)으로 승격되면서 일본인이 면장으로 등장하고 특별면의 행정자문기관인 김천사업조사위원회(金泉事業調委査委員會)가 한국인 5명과 일본인 10명으로 조직되어 당시 김천의 중요 현안인 ①감천제방(甘川堤防) 구축사업 ②혼마치(本町:지금의 용두동으로 일본인 거주지) 일대 바둑판처럼의 시가지 조성사업 ③삼각로타리~감천제방간 도로 확장사업 등의 기획ㆍ예산ㆍ시행을 심의 결정하였다.
조사위원회의 한국인 5명은 朴ㆍ石ㆍ陳ㆍ黃ㆍ李씨로 李씨는 이상관(李相寬)이다. 김천의 경제권을 장악한 일본인이 행정권마저 손아귀에 넣고 안하무인으로 횡행하면서 한국인을 멸시하던 그들이 한국인을 찬양하는 비라면 있는 것도 없앨 판국인데 3ㆍ1운동 와중에서 얼마나 다급했으면 한국인을 찬양하는 비를 세웠을까. 그것도 주인공의 이름도 없이 직함만 적은 비를 말이다.
침략자들의 얄팍한 심상이 담긴 비가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역사의 거울로 남아 있는 것이다. - 없어진 비
남산동 김천문화회관 서쪽 김천초등학교 놀이터는 원래 못이었다. 놀이터로 조성되기 전에 다섯 자 가량의 낡은 비가 못가 석축 벽에 비스듬히 누워져 있었다. 전면에 ‘전몰군마견구위령비(戰歿軍馬犬鳩慰靈碑)’라 새겨진 비명 글씨는 큼직하게 반초서체로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다. 일본이 이곳에 와서 싸운 예는 1592년 임진왜란밖엔 없는데 임란 때 일본군이 적군을 파죽지세로 석권하고 후방사령부를 개령면 동부리에 설치하여 후방의 전시 행정업무를 수행하면서 교통의 요지인 김천역(金泉驛:김천초등학교 서쪽 정문 앞에 있었다)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놀이터 공사가 끝나면서 이 비가 없어졌다. 일본군이 임진란에 말과 개는 물론이고 비둘기까지 동원했다는 증거의 임진란 중요 사료이므로 놀이터 조성공사를 맡았던 업자를 수소문하여 비의 행방을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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