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 조룡(釣龍),쌍괴(雙槐),양지(陽地)등 세 마을로 이루어졌었는데 1914년 인근의 봉곡,조현을 합해 조룡리로 하여 김천군 대덕면으로 되었다가 1960년 원조룡 등 5개 마을이 조룡1리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칭 섬실, 섬계(剡溪)로 불리 어지는 조룡1리는 조선 세조때 공조판서를 역임한 백촌 김문기 선생의 후손인 17세 경욱(慶郁)이라는 분이 영동에서 이거해 정착한 이래 김녕김씨 충의공파 집성촌을 형성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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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룡마을의 지명유래가 된 마을앞 봉곡천 일대. | 김문기(1399-1456)선생은 김녕김씨 9세손으로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로 재임시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박팽년, 성삼문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계획하다 다 사전에 발각되어 아들 현석(玄錫)과 함께 순절한 충신이다.
뒤에 1791년 정조임금이 홍문관에 명하여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할 때 민신, 조극관 등과 함께 삼중신(三重臣)으로 선정되었다.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 선생을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결정하고 선생의 가묘를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을회관이 소재한 본동인 조룡골은 원조룡(元釣龍)으로도 불리는데 김녕김씨 일가가 처음 정착한 마을로 마을앞 봉곡천에 옛날 용을 낚았다는 용구(龍口)라는 웅덩이가 있어 낚을 조(釣)자에 용룡(龍)자를 써서 조룡(釣龍)이라 했다고 전한다.
조룡마을 앞산은 당그래봉으로 불리는데 당그래는 곡식을 끌어담는 z농기구로 산의 형상이 이와 흡사하다하여 붙은 지명으로 이 산 나무의 잎이 무성하면 마을에 풍년이 들고 잎이 빈약하면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동민들 사이에 회자된다.
양지마을에는 김문기선생과 아들 현석 부자, 삼강행실도에 그 행적이 오른 장지도, 윤은보, 서즐을 모신 섬계서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99년 복원되었고 서원 뒤뜰의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또한 조룡리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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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의 유일한 천연기념물인 성
계서원 은행나무 |
맞은편 음지마을 뒤골짜기는 머릿골로 불리는데 옛날 어느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더니 7일만에 아이가 벽을 기어 오르는 등 기행을 많이 하자 부모는 아이가 장차 큰일을 저지를까 걱정되어 죽여 버렸고 다음날 말 한 마리가 찾아와 아이의 시신을 보곤 슬피 울면서 시신을 물고가다 머리를 이 골짜기에 묻어주고 갔다하여 머리골로 불리어 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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