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명은 고향을 떠나는 타향살이에서 시작된다. 화이트는 고향을 등진 현대인을 조직인이라 했다.
울적할 때면 고복수가 부른 ‘타향살이’를 곧잘 흥얼거린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버들피리 꺾어 불던 그때가 옛날’
고등학교를 졸업한 까까머리 소년이 서울로 떠나간 그날로 나의 타향살이는 시작되었다. 어언 백발이 성성한 노년이 되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손가락이 모자라 헤아릴 수가 없다. 고향 봉계를 떠난 지 훌쩍 반백년이 되었다. 어릴 적 동무들과 뛰놀던 좁은 골목길과 빈대 벼룩이 함께 밤을 새우던 낡은 초가집이 아스라이 꿈만 같은 데 그리운 고향은 멀어만 간다.
고향에 대한 집념은 사람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고향은 단순한 지명(地名)이 아니라 나를 있게 한 생명이며 조상의 얼이 살아 숨쉬는 역사이며 청운의 꿈이 자란 곳이다. 도처에 청산이 있어도 고향은 그 어떤 명승지보다 아름다운 곳이며, 도처에 사람이 있어도 고향사람보다 순박한 인정의 샘물이 넘쳐날 수 없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필설(筆舌)로 형언할 수 없는 혼이며 정신이다.
‘고향은/노고지리 초록빛 꿈을 꾸는/하늘을 가졌다//폴폴 날리는 아지랑이를 호흡하며/산냉이도 자라고/할미꽃 진달래 송이송이 자라고//태고적 어느 신화의 여신이 속삭였다는/사랑의 밀봉 울안처럼 왱왱 풍성하다//언덕을 지나고 시내를 건너고/노래 맞춰 고향으로 간다//고향은 아직도 내 마음에 너그럽다’
김수영의 ‘고향’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이다. 비단 그의 고향뿐만이 아니라 고향은 그 누구의 고향이든 간에 들녘에는 노고지리 우짖고 아지랑이 하늘거리며 산에는 진달래 붉게 피어 신화의 여신이 꿀벌의 노래에 맞춰 사랑을 속삭이는 유토피아이다. 고향을 지척에 둔 사람이나 고향을 머나먼 북쪽 하늘 아래 둔 사람이나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한결 같다.
‘머나먼 남쪽 하늘 그리운 고향/사랑하는 부모형제 이 몸을 기다려/천리타향 낯선 거리 헤매는 발길/흐르는 눈물에 설움을 타서 마셔도/마음은 고향 하늘을 달려갑니다’
설움 속에 잔잔히 흐르는 고향 그리움은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는 지독한 향수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하늘 아래 기다리고 계시는 늙으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온다. 고향에는 나를 낳은 부모와 형제가 기다리고 있기에, 고향에는 나를 키운 꿈이 서려 있기에, 고향에는 나를 반기는 친구들이 있기에 마음은 고향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고향이 옛 고향이 아니다. 고향의 인심도 변하고 고향의 산천도 변했다. 소담스런 보리밥상 위에 얹혀 있던 구수한 숭늉과도 같은 인정은 온 데 간 데 없다. 고향을 둘러치고 있던 탱자나무 울이 헐린 지 오래다.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에 떠밀려 고향의 모습이 일그러졌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산꿩이 알을 품고/뻐꾸기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정지용의 ‘고향’은 고향을 잃어버린 자의 상실감과 비애의 처절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향은 고향의 진정성을 잃어버린 고향의 비극이다. 현대인들은 고향에 찾아와서도 고향을 느끼지 못하는 ‘고향 상실의식’에 빠져있다.
하지만 어쩌랴! 고향은 고향인 것을. 타향살이를 하다보면 ‘정들면 타향도 고향’이라며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인간에게는 귀소본능이 있기에 타향살이가 길어질수록 고향 그리움은 더해 간다.
아무데나 정들면 못 살리 없건만 태어난 그곳이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라는 것을 고집한다. 죽어서도 돌아가야 할 곳은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