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의 6학년 담임을 하셨던 이우상 선생님의 사은회가 있는 날이다. 사은회 장소이자 모교인 농소초등학교는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잰걸음으로 5분 거리밖에 안 되는 장소이지만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 마다 나는 30년 세월을 거슬러 가고 있는 듯 하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지난 30년 세월을 돌이켜 보면...... .
어린시절 우리 집은 참 가난했다. 논 한 단지, 소 한 마리가 재산의 전부였던 부모님은 줄줄이 달린 자식들 때문에 남의 소작농으로 일하셨다. 부모님이 부치는 그 밭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은 족히 걸렸기에 부모님은 늘 이른 새벽에 밭일을 나가시는 일이 많으셨다.
그날 아침에도 일어나 보니, 부모님은 일을 나가시고 안 계셨기에 나는 잠을 못이기는 동생들을 깨워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학교 갈 채비를 해 주는 으레 해 오던 일을 했다. 허나, 그날은 무척이나 더디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무슨 까닭일까? 하긴 자잘한 변수는 매일 같이 따라다녔으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홉 살 된 둘째 동생이 육성회비를 꼭 가져가야 한다고 울어댔다. 우는 동생을 달래며, “언니가 엄마에게 받아서 학교로 갖다 줄게” 하고는 동생을 학교로 먼저 보냈다.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철이 없었다. 나는 단순히 엄마가 깜빡하신 줄로만 알고 부모님이 일하고 계시는 밭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밭일을 가시는 부모님이 돈을 가지고 있으실 리가 만무했는데 말이다. 부모님은 육성회비 때문에 한 시간이나 걸어서 온 나를 보시고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부모님 마음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간 곳이 하필이면 같은 반 친구였던 정희네 집이었다. 부모님은 정희 엄마에게 돈을 빌려 내 손에 꼭 쥐어 주셨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책가방도 없이 보자기를 허리에 질끈 동여 메고 학교를 오가던 내가 꿈을 가지게 된 것은 육성회비를 들고 학교로 간 며칠 뒤였다.
학교에 도착하니, 아침부터 교실 안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묵묵히 내 자리로 다가가 앉아 있었다. 나를 향해 친구 몇 명이 힐끔힐끔 쳐다보아도 ‘왜? 얼굴에 뭐가 묻었나? 쩝...... .’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앉아 있으려니, 평소에 쌀쌀맞게 굴던 정희가 내게 다가와서는 큰소리로 “경이야, 너그 집 가난하지? 너희 부모님이 어제 우리 집에 육성회비 빌리려 왔다며?”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너무 울고 싶었다.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가난이라는 말의 어감이 불러일으키는 초라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났을까? 하굣길 농로를 같이 걷던 단짝 순애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경이야, 너그 집에서 정희네 복숭아밭을 부친다고 정희가 소문내고 다닌대.” 하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휴...... .’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많은 친구들이 알아챘다고 생각하니...... , 순간, 서러운 맘이 복받쳐 그때부터 입을 다물고 말았던 것 같다.
과수원을 안고 파아란 기와가 하늘에 닿을 듯 우뚝 솟아 있는 정희네의 이층집이 우리 집이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볼썽사나운 큰 구멍과 투둘투둘하지만 벽돌로 둘러싸여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집 마당을 적나라하게 훔쳐볼 수없는 그런 집에 살았으면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진흙으로 이긴 담장에 담쟁이 넝쿨이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는 봄, 햇빛을 반사해서 눈을 찡그리게 하는 그런 양철대문이 있는 집이라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그 당시 우리집의 형편으로는 너무 호사스러운 꿈같은 얘기였다. 더군다나, 나는 몸도 싸리나무처럼 삐쩍 마른데다가 온 얼굴엔 마른버짐을 달고 사는 형편이었다. 그것이 가난을 상징하는 것 같아서 세수를 할 때마다 수세미로 벅벅 문지르곤 했는데, 그런 내 마음을 담임선생님이 눈치를 채신 것은 아마도 2학기에 접어 든 9월쯤으로 기억이 된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일기장 검사를 해서 가장 잘 쓴 학생에게는 만년필을 상으로 주시겠다며 그 동안 써 놓은 일기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일기...... .’ 가난 때문에 주눅이 들었던 나에게 일기는 단순한 무엇이 아니었다. 내 푸념을 들어 줄 뿐만 아니라, 뒷탈도 없고 가슴 아픈 말로 생채기를 내지도 않는 진정한 친구였다. 그래서 나는 어떤 기교나 형식도 없이 내 일상을 아무런 숨김없이, 편안하고 솔직하게 적어왔었다.
반장이 일기장을 거둬 담임선생님께 제출한지 약 일주일이 지난 월요일 아침이었던가. 교탁에는 선생님이 준비하신 분홍 장미꽃이 잔잔히 수놓인 선물 포장이 놓여 있었다. 반 친구들도 그러했겠지만, 나도 ‘저 아름답게 포장된 만년필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었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드디어, 선생님이 교탁에 서셨다. “오늘은 선생님이 약속한대로 일기를 꼬박꼬박 쓰고 하루의 생활과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잘 쓴 학생에게 상을 줄 거예요. 다들 열심히 잘 썼지만, 가장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잘 쓴 사람은......바로, 경이다. 경이야, 앞으로 나오너라.” 그날 나는 친구들의 부러움과 시샘이 잔뜩 실린 박수를 받으며 예쁘게 포장된 만년필을 상으로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한 마리 새가 된 듯이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오늘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꿈을 이루게 한 것은 늦은 그 날 밤 잠자리에 들 무렵 한 장의 편지를 읽고 난 후였다. 가슴 벅찬 사건을 적으려고 일기장을 펼쳐드는데 그 속에는 선생님이 내게 쓰신 한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경이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는 꿈이 있는 사람이란다. 꿈이 사람을 만든단다. 꿈을 가져라, 선생님도 가난한 집의 맏이였단다. 선생님은 어릴 적에 잘 먹지 못해서 키가 이렇게 작은 것 같다. 그렇지만 가난을 원망하지 않는다. 가난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거야. 경이야, 선생님은 네 가 네가 꿈을 이루는 것을 보고 싶구나.”
그 한 장의 편지는 우물 안의 개구리 같았고,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던 나에게 꿈을 가지게 했다. ‘나도 선생님을 닮은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지...... ’ 하고.
졸업 후 시내에 있는 중학교를 입학해서도 나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 후 고등학생이 되어서 학교에서 내어준 장래 희망란에 선생님이 주신 만년필로 교사라고 힘있게 적었다. ‘나는 이우상 선생님을 닮은 좋은 선생님이 되겠어......’라고. 그리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대학교를 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내 밑으로 두세 살 터울로 줄줄이 세 명의 동생이 있어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돈을 벌어 와야 되는 형편이었지만, 꿈을 이루는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를 포기할 순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말 내 희망대로 교육대학교에 입학했고 나는 졸업 후에 꿈에도 그리던 교사가 되었다.
첫 발령지로 증산면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굽이굽이 실타래처럼 돌고 도는 아찔한 산을 넘고 또 넘어야 있는 작은 학교였다. 나는 그 학교에서 내가 아닌 이우상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했다. 내가 맡은 반 아이들의 집은 대부분 산나물을 뜯어 생계를 이어가거나, 농사라고 해야 고작 입에 풀칠 할 정도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뿐인 아이들에게 나는 매일 일기를 쓰게 했고 어린 나에게 꿈을 갖게 해 주신 이우상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의 일기장에 댓글을 달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의 그 아이들이 모두 나처럼 꿈을 갖고 키워 나가기를 간절히 바랬다.
앞이 한 치도 보이지 않은 일제강점기 같았던 막막했던 시절, 내가 이우상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나는, 삼십년 전의 삐뚤빼뚤한 단발머리 열두 살 소녀가 되어 있었다.
선생님을 만나면 아마 나는 촌스럽게도 눈물을 뚝뚝 흘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님께 말씀드릴 것이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 선생님, 고맙습니다.”
스승이 제2의 부모라는 말의 의미를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나는 전교생이 50명이 안되는 작은 학교의 5학년 담임으로 있다. 오늘 선생님을 뵙고 나면, 다시 선생님의 열정적인 참교육 정신을 에너지로 받아, 그 옛날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셨던 것처럼 다음 주 월요일에는 사랑을 가득안고 학교로 출근을 할 것이다.
월요일에는 꿈을 가꾸는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내 자식들을 만나러 간다.
앞으로도 나는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
그것이 교직에 있는 동안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저에게 꿈을 주셨고, 또한 지금도 꿈을 가지게 해주시는
이우상 선생님, 선생님의 은혜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2008년 04월 어느 봄날 꿈꾸는 제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