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영남의 오아시스 송설당교육재단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인재 육성의 요람 김천중.고등학교
“나는 원래 자수성가해 남보다 넉넉하게 지내는 편이나 그것을 가지고 일찍부터 무엇을 하려고 생각했으되 오늘까지 가정상 형편으로 결정을 하지 못했다가 이번에야 결행을 한 것이오. 김천은 나의 고향인만치 그곳을 항상 생각한 것은 물론이며 더구나 경상북도는 인구가 그렇게 많은데다가 중등 정도 학교가 한 곳 밖에 없는 것을 늘 유감으로 생각했소.”
(1930년 2월26일자 동아일보 기사 중 발췌)
일제강점기 전 재산을 털어 고향 김천에 학교를 세운 최송설당의 교육이념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이다.
당시 대표적 사학 설립자인 안창호(대성), 김성수(중앙), 민영환(흥화), 이용익(보성), 민영휘(휘문), 아펜젤러(배재) 등은 모두 남성이었지만 전국에서 열한 번째로 사학을 건립한 최송설당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의 보모로 10년 동안 덕수궁 생활을 마치고 나온 송설당은 사회사업을 활발히 벌였던 여걸이면서 한시와 국문 가사에 능해 ‘송설당집’을 남긴 궁중 여류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거액이었던 30만원이 넘는 전재산을 해인사에 시주하려고 했으나 친일세력이 사찰을 장악한 것을 우려한 만해 한용운과 지역 인사들의 설득으로 학교를 설립하게 됐다.
경상도에서는 유일한 사립학교였던 김천고보(현 김천중·고)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송설교육재단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송설역사관’을 지난 31일 개관했다.
송설역사관에는 송설당의 삶과 민족교육에 대한 열정, 개교 이후 국내외 정세를 보여주는 각종 사진과 자료들로 가득하다. 특히 1935년 개교 4주년 기념식과 최송설당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당시 우파 지도자 송진우와 좌파 지도자 여운형이 송설당과 함께 찍은 사진은 민족교육과 인재육성에 헌신해 온 송설당의 발자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이 땅의 젊은이들을 배움의 굶주림에서 해방시키면서 명문 사학으로 발전해온 김천 중·고의 발전사도 접할 수 있다. 일제에 맞서 우리 청년들의 강인함을 보여주기 위해 매년 12월이면 학생들이 러닝과 팬티만 입고 달리는 이 학교 전통의 명물 ‘내한(耐寒) 마라톤’ 사진도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배출한 4만여명의 졸업생 중에는 송설역사관 추진위원회가 선정한 우리나라 정치·경제·학계·법조·관계를 대표하는 ‘송설을 빛낸 인물’ 150여명이 역사관에 전시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김천 중·고 총동창회는 8년간에 걸친 자료수집과 준비 끝에 송설역사관을 개관하고 기념책자도 발간했다.
영남의 오아시스(1931~1939)
송설당은 1930년 2월3일 학교 설립을 위해 전 재산을 희사하겠다는 결정을 낸린 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천의 교육환경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경상북도는 인구가 그렇게 많은데도 중등학교가 한 곳 밖에 없는 것을 늘 유감으로 생각했소.”
1931년 5월9일 개교식에는 이인, 여운형, 조만식 등 민족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해 송설당에 대해 “동양 최대의 영성 육영사업가”라고 극찬했다.
또한 여운형은 축사에서 “김천에 들어와서 우리의 생명탑이라 할 만한 이 고등보통학교가 뚜렷이 서 있음을 발견하매 ‘오아시스’를 만남과 같아서 얼마나 반가운지 깨닫지 못했습니다”라며 송설학원이 향토만의 학교가 아니라 민족혼이 숨쉬는 겨레의 교육장임을 강조했다.
학교 교장(校章) 제정
1931년 3월10일 학교 교장(校章)이 제정됐다. 창안자는 이한기, 고덕환 두 분. 두 분은 송설학원의 표상을 제정함에 교주 최송설당의 설중송(雪中松) 같은 지절(志節)을 최대한 반영토록 했다.
교장의 전체적인 윤곽은 눈의 결정체인 육각형으로 하고 그 가운데에 김천고등보통학교의 고(高)자를 넣어 구심점으로 삼았으며 거기에 각의 정점을 향해 빗살무늬 모양의 솔잎을 형상해 송(松)과 설(雪)을 조화시켰다.
이 교장은 중·고로 분리되면서 고보의 ‘高’ 대신에 중학교는 ‘中’자를, 고등학교는 ‘高’자를 넣어 모표와 단추에 사용해오다가 1985년 교복 완전자율화 이후에는 교기에만 사용했다. 고등학교는 1988년, 중학교는 1991년 다시 교복을 착용하면서 교장을 교복의 단추와 상의 왼쪽 깃에 부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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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중·고 교주 최송설당(1855~1939) 화가 김현철이 그린 최송설당 영정 (비단 위에 진채188×9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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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궁중 여류시인이었던 최송설당(본명 미상)은 철종6년 김천에서 화순최씨 집안의 세 딸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홍경래 난에 연루돼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고자 큰 뜻을 품고 상경해 엄비가 낳은 영친왕의 보모가 돼 황실과 인연을 맺었다. 1901년 집안을 복권시키고 궁을 나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31년 전 재산을 희사해 교육환경이 척박했던 김천에 인문계 사립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세워 한국 근대를 대표하는 여성교육자가 됐다. 유언으로 “길이 사립학교를 육성해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잘 교육받은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동양을 편안케 할 수 있다”는 건학이념을 남겼다.
수많은 민족지도자와 선각자, 지식인과 교류했고 시문(詩文)에 능해 한시 259수와 한글 가사 50편을 남겼다.
외람히도 송설당(松雪堂)이라 칭한 나를 비웃으나/이 마음은 뭇 꽃들과는 짝하기 싫어서였네/세월 겪으며 푸르고 창창한 바탕 기대하고/다만 사랑한 것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함이었네/가업(家業)을 실추하여 망극한 심정 가없어도/여자로 태어난 이내 몸 한(恨)은 길기만 하였네/인간 세상 많은 풍상 겪은 액운을/이 다음 장차 옥황께 하소하리
‘송설당집’ 1권에 수록된 ‘송설당원운(松雪堂原韻)’으로 자신을 종합적으로 드러낸 시다. 송설로 호를 삼은 이유와 가문의 명예회복에 여자란 신분으로 겪어야 했던 한과 스스로 희구해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의 괴로움은 하늘이나 알 일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사장 정해창
송설 20회
서울대 졸업
대검차장검사
법무부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재경김천향우회장
현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장
한국범죄방지재단 이사장
좋은합동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
이사 강석호
송설 21회
서울대 졸업(공학박사)
영남대 공과대 교수
현 영남대 명예교수
강석호분체공학연구소장
이사 안청시
송설 27회
서울대·미국 하와이대 졸업(정치학박사)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교수
한국정치연구소장
현 서울대 교수
감사 정경수
송설 31회
건국대 졸업
대구지방변호사회 김천지회장
현 변호사
이사 여만종
송설 24회
성균관대 졸업
선전자공업(주) 전무
아태산업(주) 대표
현 우일기업 대표
이사 이외수
송설 27회
서울대 졸업
국가정보대학원장
국가정보원 대구지부장
현 경운대 교수
감사 최동현
송설 33회
수원대학원졸업(경영학박사)
서초세무서장
한국세무사회 부회장
현 U-TEX세무회계사무소장
경희대 교수
이사 송석환
송설 26회
동국대 졸업
동진기업(주)·동진프라스틱(주) 대표
이사 이종성
송설 28회
서울대 졸업
국세심판소장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현 삼양건설산업(주) 회장
사무국장 김광수
송설 27회
서울대 졸업
삼양화학공업(주) 기술연구소장·영동공장장
현 삼양화학공업(주) 고문
송설당은 엄상궁이 모태 중이었을때 봉은사를 찾아 왕자를 점지해 달라고 불공을 드렸다. 남다른 그의 정성이 최고로 바치면서 이를 계기로 입궁하게 되었다. 입궁 후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고 입궐한지 4년만에 고종황제에게서 신원을 내려받아 89년만에 선조의 명예를 회복하게 됐다.
명문사학으로 우뚝 선 송설(1960~1989)
1960년대 송설학원은 김천고보시절의 명예를 회복, 명실공이 영남의 명문사학으로 자리 잡았다. 1963년 8월15일 정부는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송설당에게 문화포장을 추서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사학으로 민족정신을 함양한 송설당의 공을 국가가 인정한 것은 송설당 뿐 만 아니라 송설인 모두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활력을 되찾은 재단은 교세 확장을 위한 학급 증설, 시설 확충에 박차를 가해 증축하고 부대시설 완비에 전력했다.
1975년 연건평 142평의 도서관 증축하고 1984년부터는 서산농장을 학교가 관리해 농지를 정리하고 획기적인 증산책을 강구했다.
1979년 송설 22회가 주최한 송설동창회장기쟁탈 기별축구대회가 오늘날 송설을 대표하는 동문 행사로 자리 잡았다.
1981년에는 ‘송설50년사’와 ‘동창회 명부’를 발간했으며 송설당 흉상을 제막하는 등 다영한 기념사업이 펼쳐졌고 ’송설로‘가 명명됐다.
늘 푸른 송설(1990~2008)
1990년 연건평 667평의 최신식 기숙사 ‘청운료’를 준공함으로써 우수학생 유치와 학력 신장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1971년 이래 평준화된 중학교는 교육력 제고를 위한 특단의 노력으로 오늘도 여전히 학생과 학부형으로부터 가고 싶은 학교로 손꼽히고 있다. 고등학교 역시 인문계 명문으로 자리 잡아 대학입시에서 전국 굴지의 학교로 성장했으며 1984부터 1986년까지 3년간 경상북도 학력 최우수 고등학교로 선정되는 저력을 과시했다.
2004년 대강당 ‘세심관’과 중등 최초로 태권도 전용체육관이 마련됐다. 중학교는 2006년 ‘자현도서관’, 고등학교는 2007년 ‘솔도서관’을 개관했다. ‘깨끗하고 부지런하게’ 몸과 마을을 갈고 닦아 온 송설인. 송설인은 사학의 명문이자 자랑스런 향토 김천의 긍지를 품고 한국 교육의 백년 대업에 큰 몫을 담당하는 재목으로 자라가고 있다.
송설총동창회 & 지구별 동창회
송설총동창회는 1945년 8월15일 광복의 기쁨과 함께 탄생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송설의 동창들은 애국가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송설당 동상 앞에 모여들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모인 동창들은 곧바로 송정의 최송설당 묘소를 찾아 광복의 기쁨을 알리고 송설 동문의 우의를 다지며 계세전승(繼世傳承)하기 위해 송설동창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송설동창회의 발족은 향토 김천의 발전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민족적 비극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고 조국 건설의 희망을 갖게 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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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줄 왼쪽부터 이한기, 김종호, 조상걸, 최동열, 고덕환, 최석태) |
송설당과 수임5이사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운동의 주체가 된 수임이사들은 송설당교육재단의 설립과정에서 일제 탄압으로 인한 무산의 위기를 노력의 결과로 극복하고 설립 후 국내 우수한 교육진을 영입하려고 노력하는 등 여러 가지 재단 사업을 내 사업같이 벌이면서 재단의 충실을 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