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연필 소리 윤애라 시인·부곡동 우방아파트 아흔을 넘기신 아버지는 지금도 필기를 좋아하신다. 아버지 책상에는 여전히 연필꽂이 잔뜩 갖가지 필기구가 담겨있고 여러 기록들이 어지러이 붙어있다. 딸 사위들 전화번호를 수시로 다시 써 놓기도 하고 성경을 노트 빼곡히 적어두기도 하고 가끔은 설교를 지어보기도 하시는 것 같다. 아직도 여전한 필체지만 힘들여 기억을 되살리며 한 글자씩 써 놓는 그 수고가 안타까워 가슴이 먹먹해 진다.
어렸을 때 우리 자매들은 아버지 방에서 노는 걸 좋아했다. 숨을 들이키면 온 몸에 환하게 새겨질 것만 같은 글자냄새, 노랗게 바래어가는 종이냄새, 모나미 푸른 잉크냄새, 연필냄새 등 그 냄새에 파묻혀 깔깔대는 걸 좋아했다.
가끔씩 아버지는 서랍을 열어 노란 고무줄로 꽁꽁 묶어두었던 연필들을 우리에게 한 두 자루씩 주셨는데 그런 날은 축복받은 날이다. 어느 문방구에도 없는 희한한 연필들이었기 때문이다. 끝이 넓적한 4B연필에서부터 글자를 써서 침을 묻히면 보라색으로 변하는 연필, 방울이 딸랑대는 연필까지 아버지 책상은 요술서랍 같았다. 샘을 내고 다투어 좋은 연필을 받아 종이에 써보면 사각사각 그 느낌은 정말 맛이 났다. 연필소리가 사과 씹는 소리 같다고 하면 아버지께서는 흐뭇하게 웃으셨다. 무엇이든 써보고 무엇이든 그려보고 종이를 새카맣게 메워보면서 우리는 글자모양을 다듬고 필기를 배웠다.
다행히 나는 지금도 연필을 좋아한다. 더 다행인 것은 그 연필을 수북하게 갖고 다니는 아이들을 날마다 만나는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예쁘고 희한한 연필을 좋아하는 내가 눈을 반짝이고 탐을 내면 정이 많은 이 녀석들은 성큼 주고 가기도 한다. 말끔하게 깎아 놓은 연필들을 연필꽂이 수북하게 담아놓고 보면 까만 꽃술을 단 꽃무더기 같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가장 좋을 때는 뭉툭해진 연필을 깎아줄 때와 열심히 글을 쓰는 습작 소리를 들을 때이다. 사각사각… 타닥 탁 탁… 고개를 갸웃하고 손가락 팽팽하게 힘을 주고 몰입하는 그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고요한 즐거움이다. 빙긋이 웃으며 쳐다보고 있으면 내가 이 소리를 제일 좋아하는 것을 아는 이 녀석들은 글을 쓰면서 흘끔흘끔 내 시선을 의식한다. “선생님은 이 소리가 제일 좋지요?”하고 글을 쓸 때마다 칭찬 받기 위해 확인한다. 영리한 녀석들은 일부러 종이에 타탁 탁 탁 점을 찍으며 나를 놀리기도 한다. 아이들은 내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실천하려고 애를 쓰며 보상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른이 갖지 못하는 깨끗한 보상심리! 그게 눈물 나게 어여쁘다. 이 작은 인정 하나가 아이들에게 더 없는 자긍심이 되었으면 한다. 독서를 통해 물을 주고 토론과 글쓰기를 통해 거름을 준다고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항상 부족한 마음이고 이 아이들을 만나는 나는 넘치게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연필의 고향은 나무, 종이의 고향도 나무이다. 그래서인지 그 둘이 만나는 소리는 오랜 고향 친구처럼 정겹다. 썼다가 지울 때는 종이와 연필이 화해하는 것 같다.
아버지 방에선 늘 꾸덕꾸덕한 나무냄새가 났었다. 이번 주말에는 아버지 묵은 책상 서랍을 열어 어디 가질만한 연필이 없나 살펴봐야겠다. 지금도 아버진 필기구를 사 모은다고 어머니가 그러셨으니 희한한 연필들이 있을 것이다.
동생들을 필히 데리고 가야겠지. 샘을 내고 다투어 좋은 것을 가져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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