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68)
교동편
▷교동(校洞)
-김산골. 구읍-
교동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동잠현과 금산현, 금산군의 관아가 위치했던 이 지방의 오랜 읍치(邑治)이자 문화의 중심으로서 1914년 일대의 마을들을 삼락동과 문당동, 교동으로 나누어 금릉면으로 개편하였다가 1931년 금릉면이 김천읍에 편입되었고1983년 삼락동, 문당동, 교동을 합해 금산동(金山洞)이라 했다.
김산향교가 있음으로 해서 교동이라는 지명을 갖게 된 이 마을은 동쪽으로 부춘산을 사이로 시청이 있는 신음동과 접해있고 서쪽은 구화산에서 발원한 소하천(지금은 복개가 됨)을 경계로 삼락동과 맞대고 있다.
교동은 조선시대에 금산군 군내면으로 속해 향교가 있는 일대를 일컫는 교리(校里)와 향청이 있던 향리(鄕里)로 나뉘어 불리기도했다.
또 김산골, 동부, 서부, 구읍으로도 불렸는데 김산골은 옛날 김산군의 읍이 이곳에 있었임으로 해서 붙은 지명이며 동부와 서부는 마을의 중심을 관류하는 소하천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의 마을을 각각 일컬음이며 구읍은 이 지방의 중심이 1905년 경부선개통과 함께 평화동, 남산동 일대로 이동하면서 예전의 읍(邑)이라는 뜻의 구읍(舊邑)이라 칭한 것으로 보인다.
1996년 택지개발과정에서 발견된 김산군 관아지와 객사지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 과정을 통해 읍치에 대한 규모가 나타나 학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관련 사료에 나타난 김산군의 행정조직은 종4품의 군수1인과 별감2인, 군졸 53인등이 있었고 1482년(성종13년) 건립된 관아와 객사, 향사당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김산향교 전경
김산관아와 함께 중심축을 형성한 김산향교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고증할 길이 없으나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군의 남쪽 1리에 향교가 있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적어도 1530년 이전부터 향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산향교터에는 원래 신라 때 창건된 구화사(九華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조선이 개국되면서 그 절을 허물고 김산향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후 임란 때 전소된 것을 1634년 (인조12) 조마 강곡의 진사 강설(姜渫)과 아들 강여구가 지금과 같은 규모로 중수하기에 이르렀다.
화재로 대부분의 자료가 사라졌는데 1718년에 여이명(呂以鳴) 선생이 쓴 금릉지(金陵誌)에는 당시 김산향교의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주목된다.
“내가 어렸을 때 향교에 출입하면서 어른들이 인사하고 사양하는 예절을 보고 과연 인륜이 밝음을 알게되었다.그때부터 조심하는 마음이 생겨 향교문을 드나들때 의관을 바로하고 태만한 생각을 못했다. 전에는 동재,서재에 유생들이 5,60명에 불과했는데 지금와서는 백여명이 넘고 향사일에는 고성으로 떠들고 천한 사람이 귀인을 능멸하는 등 망칙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나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선후기 들면서 향교의 권위가 떨어지고 풍기가 문란해가는 모습을 뜻있는 선비로서 안타깝게 그리고 있는 대목이다.
향교 인근에는 관아에 딸린 연못인 연화지(鳶華池)와 그 가운데 정자 봉황대(鳳凰臺)가 섰는데 봉황대는 처음 관아 맞은편 북쪽에 있으면서 읍취헌이라했는데 윤택(尹澤. 재임:1707-1711)군수가 이곳에서 낮잠을 자다가 봉황새가 날아드는 꿈을 꾼 후 봉황대라 이름을 고쳤고 1838년 이능연(李能淵) 군수가 지금의 자리인 연화지로 옮겼다.
▲연화지의 아름다운 자태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