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구절초 피는 가을
이진옥
주부·어모면 중왕리
“빨리,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 먹어야지.”
“양치는 했니? 옷 좀 바로 입어라.”
벌써 사춘기가 찾아왔는지 나날이 투정이 느는 아들 녀석과 아침전쟁을 치르고 달그락거리는 설거지도 마쳤다. 창 너머로 햇살이 좋다. 이런 날엔 일찌감치 세탁기를 돌려야 제격이다. 방방을 돌며 빨래 찾아 삼만 리. 큰 맘 먹고 이불까지 둘둘 뭉쳐 욕조에 집어 던진다. 둥둥 다리를 걷고 윙윙거리는 세탁기 장단에 맞춰 한마당 이불 살풀이를 벌인다.
“수돗물에 계시고 세제에 계시고 섬유유연제에 깃든 신령님들, 묵은 때는 빡빡 긁어 가시고 상큼한 향기 팍팍 풍기게 하소서. 얼쑤!”
쏴아 하고 빠지는 말간 물을 보고서야 거룩하게 한마디 던지며 손을 턴다.
“때 많은 이불이여, 너의 죄를 사하노라.”
낑낑거리며 한 아름 전리품을 앉고는 베란다로 달려 축축해지는 볼따구니를 감수하고 마지막 엎어치기 한판. 그리고 손목을 꺾어 옆구리에 걸치고 빨랫줄에 늘어선 전리품에 쟌다르크마냥 흐뭇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때였다. 베란다 구석 볼품없는 화분에 핀 꽃이 눈에 들어왔다.
구절초, 산모퉁이 깎아지른 벼랑에서도 한줌 흙만 있으면 뿌리를 내리는 풀, 한줌 햇살만 들면 시퍼런 잎을 내밀고 얼마나 독한지 벌레도 먹지 않는 풀, 모진 비바람에 줄기와 잎이 너덜거리고도 찬이슬 내리기 시작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해맑게 피어나는 꽃, 철퍼덕 퍼질고 앉아 턱을 괴고 바라본다.
“가을이구나.”
잔뜩 부풀었던 풍선 바람 빠지듯 한마디가 입가로 새어나온다. 한 치 여유도 없이 달리는 일상에서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 푸르다 못해 시퍼런 저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본지 얼마나 되었을까? 누가 칼질이라도 하듯 때 되면 옅어지고 조각나는 구름, 저 사이로 곧 기러기도 날겠지.
그러고 보니 바람이 서늘하다. 달궈진 콘크리트 더미에서 한밤에도 헉헉거리며 잠 못 이루던 날이 엊그젠데. 창틈으로 새어드는 파삭한 햇살을 만지작거리며 한결 느슨해진 이맛살에 찻잔만큼의 행복을 담는다.
늘어지는 시선으로 꽃잎을 세어본다. 하나, 둘, 셋.... 열다섯 장 하얀 꽃잎에 노란꽃술. 화려하진 않지만 포실한 웃음, 쌉싸래한 그 향기가 우리네 삶을 참 많이도 닮았다. 거름 한 줌 보태주지 않아도 저리 꿋꿋하지 않은가. 만인의 눈길 끌지 않으면 어때 백번을 세제로 씻은 들 저 맑음을 흉내 낼 수 있을까?
조심스런 손길로 그 하얀빛을 살짝 쓰다듬고 손톱보다 작은 그 꽃임에 뛰어들어 솜털보다 부드러운 꽃술에 누워본다. 동쪽 울타리아래 국화꽃 꺾어 들고 아득히 남산을 바라보았다던 도연명을 흉내 내듯. 아침저녁 산 노을에 게으른 새들의 날개 짓에서도 삶의 참맛을 느꼈던 넉넉한 시인의 마음을 다시 한 번 그려본다.
그렇게 감은 눈꺼풀로 따스한 햇살의 온기를 느끼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뜬금없이 놀래키곤 익살스럽게 웃음을 지어보이던 옛 친구가 창가에라도 서 있는 듯. 이젠 세 아이의 엄마로 나보다 부산스러운 아침을 맞았을 그 친구에게 오늘은 전화라도 해보아야겠다.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