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론 가을이 보내온 편지 배영희 교육학 박사·효동어린이집 원장 하늘이 바다처럼 참 푸릅니다. 마치 우리가 커다란 금붕어 어항 속에 있고 수면 위로 하늘이 떠있는 것만 같습니다. 가을입니다. 그것도 깊어가는 가을입니다. 텃밭의 무는 밤새 한 뼘이나 쑥 올라왔고 따사로운 햇볕아래 암탉은 며칠째 꼼짝 않고 알을 품고 있는걸 보니 곧 병아리가 태어날 모양입니다.
오늘 아침엔 노란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아스팔트 위로 출근을 하며 ‘아~! 으아!’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소리 내어 토해냈습니다. 가을이 정녕 내게 온 것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건만 올가을은 유독 가슴 뭉클합니다.
지난주는 아이들과 함께 고구마를 캤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보드라운 흙을 만지며 호미질을 할 때 주먹만한 고구마가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와~아!” 하며 신기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카메라 렌즈가 멈추기라도 한 듯이 잠시 멍멍해짐을 느꼈습니다. 고구마는 그냥 고구마가 아니라 가을의 결실이었습니다. ‘새봄에 여리디 여린 새순하나 꽂았는데 여름 내내 그 비를 맞고 어두운 땅속에서 말없이 저렇게 자기 몸을 살찌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결실의 계절 가을입니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며 나는 무엇을 살찌웠던가? 갑자기 그 한 알의 고구마 앞에 숙연해 집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새 ‘인생의 가을 길’에 접어든 나이라 생각하니 어깨가 더 무거워집니다. 하루 종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퇴근하려고 차를 타려는데 차창에 빨간 단풍잎이 서너 장 떨어져 있습니다. 아니, 가을이 보내 온 편지처럼 우표 없이 딱 붙어 있었습니다. 단풍잎을 손에 들고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비바람을 이겨내고 붉게 물든 단풍잎을 보아라. 너는 언제 이토록 훨훨 불타올라 보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봄날의 연둣빛 새순도 예뻤고 여름날 푸르른 초록잎도 좋았지만 땅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붉게 불타오른 저 단풍잎과 은행잎이 눈물 날 만큼 아름답습니다. 마치 하루해가 저무는 황혼의 노을 같기도 하고 헤르만헤세의 ‘마지막 잎새’ 같기도 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 낙엽처럼 한 번씩 왔다가는 인생이건만 오늘 다시금 가을에게서 배웁니다.
‘하늘처럼 높고 맑게 걸림 없이 살아라. 땅처럼 보드랍게 다 품어 주어라. 나뭇잎 하나 어디 상처 나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냥그냥 아픔도 슬픔도 다 아로 새겨라. 그리고는 저 고구마처럼 살찌워라.’
풀벌레가 밤새 기도하는 가을입니다. 내일이면 ‘시월의 마지막 밤’ 노래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국화차 한잔하며 내 옆에 있는 이웃들에게 책갈피에 넣어둔 단풍잎 한 장씩 나눠야겠습니다. 1년 365일 그 날이 그 날이 아니라 매일 처음 맞이하는 새날이 분명하고 오늘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이 순간이 없음도 자연의 순리입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현실 속에서 함께 걸어가는 좋은 사람들과 타박타박 그러나 알차게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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