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농촌과 세상과 아이들 배창환 시인 아침에 안개가 조금 끼어 있는 가을 별뫼산은 환상적인 색감을 드러낸다. 여기저기 샛노란 들국화가 피기 시작하고 쑥부쟁이도 관목 사이로 드문드문 반짝이면서 아침 햇살 앞에 연보랏빛 이슬을 말린다. 차창의 왼편으로 계곡 건너편에 절정을 향해 솟아오르는 단풍들에 곁눈질하면서 산마루에 오를 때쯤이면 산마루에 마을이 하나 나타나고, 그 마을 길가에 작은 창고가 하나 있고 창고 앞에는 이 시간쯤에 줄을 서서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은 둘 이상 있을 때는 꼭 줄을 선다. 그런데 여러 번 그 곁을 지나치면서 관찰해 보아도 거의 예외 없이 하급생인 듯한 남자 꼬마 아이를 가장 앞에 세워두고 누나 또는 형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뒤에 서 있다. 가끔씩 가위 바위 보를 할 때도 있고 뒤에 선 누나 같은 아이가 앞 아이를 등 뒤에서 끌어안아 줄 때도 있고 서로 잡아당기거나 밀기도 하면서 어른들이 알 수 없는 저들만의 놀이를 할 때도 있지만 아이들이 그어놓은 줄은 언제나 흩트리지 않고 한결 같다. 동생을 먼저 태우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에서 나온 저들끼리의 불문율이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질서 교육의 결과라고 간단하게 말하고 싶지가 않다. 그것은 아마도 학교에서 배운 것이기도 하겠지만 함께 자라면서 마을 놀이터에서 이미 몸으로 배운 것이리라.
그 아이들의 모습과 움직임이 오래도록 내게 남아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어쩐지 어린 시절의 내 모습과 어딘가 비슷한,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한 마디로 ‘촌놈’이었던 나의 어린 시절의 순박함이랄까 순진함이랄까 그 비슷한 느낌 때문이다. 시간이 한 세대가 훨씬 지났는데도 이어지는 그것을 나는 흙이 키워준 것이라고 확신하는 편이다. 오래지 않은 내 인생의 반반을 대도시와 농촌에서 살면서 아이들을 가르쳐 온 내 경험과 상상력으로는 그 밖의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나는 저 아이들이 크면 대부분 산골을 벗어나 좀 더 크거나 아주 큰 도시로 길을 떠날 것이고 그 길이 험난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중 몇은 다시 흙으로 돌아올 것이다. 남들이 알 수 없는 어떤 상처와 자기 나름대로의 지혜를 안고 저 아름다운 가을 산에 깃들어 보금자리를 설계하고 흙을 닮은 아이를 낳고 흙을 닮은 심성을 길러내어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숨막히는 경쟁 세상이 그래도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허파와 같고 심장과 같고 실핏줄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중에 조재도 라는 충청도 시인이 있다. 내 또래의 충남 청양 사람으로 참 드물게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가 쓴 ‘아름다운 사람’이란 시에 ‘공기 같은 사람이 있다 / 편안히 숨 쉴 땐 있음을 알지 못하다가 / 숨 막혀 질식할 때 절실한 사람이 있다 // 나무그늘 같은 사람이 있다. / 그 그늘 아래 쉬고 있을 땐 모르다가 / 그가 떠난 후 / 그늘의 서늘함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는 구절이 좋아 늘 떠올리고 외우며 다닌다.
내가 농촌이 살아 있어야 세상이 산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쌀농사나 우리 먹거리, 생명 농업이 국민의 삶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은 우리에게 공기 같은 사람, 나무 같은 사람, 혼탁한 세상을 맑게 하는 샘물 같은 사람들을 키워 내보내주는 흙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농촌이 살아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 저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금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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