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백수문학관’ 개관에 즈음하여 이근구 (김천향토사연구회장) 백수문학관이 드디어 문을 연다. 백수문학관을 세워보려고 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나름대로는 백방으로 모색해 봤으나 필부지용(匹夫之勇)만으로는 역부족, 성사되지 못하고 뜻을 접은 지 10년 넘게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우람한 모습으로 우뚝 섰다. 그것도 관에서 적잖은 돈을 들여 세웠으니 건립에 담긴 뜻도 예사롭지가 않은 상 싶다. 백수 정완영(白水 鄭椀永) 시백(詩伯) 생전에 이루어졌으니 옛날 같으면 생사당(生祠堂)이나 다를 바 없다. 생사당은 정사(政事)를 잘해서 세워지는데 이 고장 출신으로는 제주목사를 지낸 노촌 이약동(老村 李約東/1416~1493)을 기려서 제주도에 세워졌었다.
백수 정완영은 문학의 고로로 백수문학관이란 이름의 생사당이 섰으니 500년을 지나 두 번째가 되는 셈이다.
문학을 두고 말한다면 ‘두시언해’와 유배가사 ‘만분가’를 남긴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가 있다.
이 고장에서는 지금까지 매계를 능가하는 문인은 없다고들 하는데 매계가 가고 500년 만에 혜성처럼 나타난 문호가 바로 민족의 시인 백수 정완영 시백이라 하겠다. 두 분이 태어난 곳도 공교롭게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도 불리는 같은 봉계마을이다. 앞으로 봉계를 두고 어떤 이름의 명당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백수문학관이란 이름이 명소로 남으려면 지난날 점필재 김종직(?畢齊 金宗眞)의 경렴당(景濂當)을 생각해봐야 한다. 조선조 초 학계와 정계를 주름잡던 쟁쟁한 지도자 사림파를 길러냈던 곳이 이 고장에 세워진 경람당이다.
백수문학관도 백수를 능가할 문인들의 배출로 지난날의 김산 문향(金山 文鄕)이 재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